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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향유하는 독자

작업노트 그림책 블렌딩


커피의 기계음을 뚫고 나오는 낙수 소리를 듣는다. 개울 가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물동이 가장자리로 밀려나 표면에 부딪히는 주르륵주르륵 물 떨어지는 소리를 많이 좋아한다. 그 소리를 담아보겠다고 놓칠세라 머그잔을 갖다 댄다. 


깨끗한, 베이지색 거품이 차곡차곡 층을 이룬다. 크레마가 형세를 이루는 그 짧은 순간, 심상에, 즉흥적인 이미지가 맺힌다.


희미한 콧바람에 얇은 수증기 장막이 걷힌다. 고유한 향미와 함께 존재함을 느낀다. 좋아하는 물소리가 베이지색 실감으로 재현된다. 멈추지 않았지만 멈춘 것 같은, 시간과 공간을 이루는 기압과 습도, 그리고 나의 습관까지, 이 모든 요소가 사로잡힌 그날의 장르가 만들어진다. 


한 번쯤 장르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우연에 기대어 또는 필연에 기대어 사람은 언제나 이야기에 목마르다. 어릴 적 추억만으로, 흥부놀부나 콩쥐팥쥐 같은 옛이야기 정도는 거뜬한 걸 보면 장르는 이미 당신을 내조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른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그림책도 하위 장르와 공생한다. 이력이 오래된 옛이야기 그림책과 판타지 그림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언제나 스테디셀러 종목이다.


오늘날의 옛이야기 그림책은 아동 문학으로서 특유의 극적인 서사와 잔혹성 짙은 면을 시각적으로 재화 할 필요에 대한 상반된 시선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희로애락은  옛이야기를 통해 격렬하게 해소되고 어릴 적 상상을 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계기가 된다.


판타지 그림책은 말 그대로, 현실이 아닌 환상 그림책이다. 현실을 한번 된통 흔들어 일상적인 경험을 낯설게 만든다. 환상 속에서 환상적인 온갖 모험을 할 수 있다. 이 와중에 현실 속 나는 책을 보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현실인가. 안전하면서도 스릴이 넘친다. 비현실에서 도전을 받고 성장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깨닫는다.


당신이 논쟁을 즐긴다면 사실주의 그림책을 권하겠다. 이 장르는 좀 까다롭다. 그 까다로운 세계관과 주제로 말미암아 등장인물의 신빙성과 서사의 설득력은 심판대에 오르기 십상이다. 사실적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기에 작품의 타당성을 부여받기 위하여 그림책 작가는 철학가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관찰을 좋아한다면 정보 그림책의 매력을, 알게 될 것이다. 최근 자연에 대한 연구 자료나 생태 관찰 내용을 인간 정신으로 투영해 재해석해낸 정보 그림책 내지는 생태 그림책이 나오고 있다. 분명히 당신의 시야를, 환기시켜 줄 것이다. 생태 외에도, 사회학이나, 종교, 철학, 언어학, 자연과학, 기술과학, 인물, 역사까지 정보 그림책의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이를 위해 그림책 작가는 인문학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장르는, 운문 그림책이다. 언어가 갖는 여백 사이의 미가 그림 안에서 새로운 운율로 탄생한다. 고유의 회화적 요소로 말미암아 당신의 정서도 새로이 증폭된다.


운이 좋다면, 살면서 한 번쯤은, 장르를 골고루 넘나드는 겸손하고 주의 깊은 독자들을 만날 수도 있다. 작품을 쉬이 비평하기에 앞서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담론을 점검하는 자들이 있다. 기꺼이 상대의 심정을 들어주고 그럴 수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여준다. 소재거리와 주제 거리를 공고히 매듭지어 마침내 하나로 공명을 울린다. 그러한 경지에 다다른 태고연한 지성이 깃든 독자 정신을 향유하고 싶다.


두 번째 커피를 내려, 그대에게 건넨다. 나답게, 안부를 묻는다. 


요즘 당신의 장르는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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