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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 도랑 그림책 사이

작업노트 그림책 블렌딩


그림책 수업 준비는 아름답지 못하다. 너저분하고 어수선하다. 내 산발 머리가 단서다. 하루 두어 시간 엄마 노릇을 내려두고 그림책에 시간을 바친다. 이걸 한다고 한 푼 두 푼 수입이 나는 것도 아닌데, 벌자고 했다면 대문짝만 한 회사로 돌아가는 게 나았을 거다. 


무엇을 붙잡고 가야 하나, 흔들리고 있을 때 이들을 만났다. 그리고 의연한 관계, 그 사이사이의 일에 관하여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지은이 김수연, 보림 출판 그림책, 어느 바닷가의 하루. 목판화의 나뭇결이 안개 자욱한 썰물 바다의 물 선과 이렇게도 닮아있다니. 아름다운 것들을 원재료에 옮겨 담는 인간의 행위가 바로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눈먼 어부와 강아지 한 마리가 그물망 줄을 따라 작업장을 향하고 있다. 어스름한 물 빛을 가르며 뚜벅뚜벅 일터로 향하는 이들은 발걸음은 정직하다. 어부의 두건과 장화는 황색이고, 강아지의 목줄과 다리는 적색이다.


작업장에 도착한 어부는 그물코를 발견하고 수선을 하는데, 갈매기가 와서 훼방을 놓는다. 그걸 두고 볼 수 없는 충직한 강아지가 있는 힘껏 뛰어올라 갈매기를 쫓는다. 얼마나 마음이 간절했는지, 갈매기로 변신을 하고 말았다. 


바로 그때 어부는, 그물코를 통해 들어온, 큰 물고기와 씨름을 하고 있다. 얼마나 큰 간절함이었는지, 어부는 물고기로 모습이 바뀌고 말았다. 둘은 온 세상 심신을 바쳐, 끝끝내 한 마리를 건진다. 오늘도 이들의 생존은 현행되었다.


텁텁할법한 판화에서 어부와 강아지의 당당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어째서 이토록 홀가분한 기분이 읽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양심껏 살아낸 이들의 하루 앞에 천 번 만 번 고개가 숙연해지는 까닭은 무얼까. 열심히 사는 사람이 행복해 보이면 이상하게 나는 눈물이 날 것 같다. 


난. 어부에 동화된 걸까, 강아지에 동화된 걸까. 다시 그물망 줄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곡선도 직선도 아닌, 인생을 닮은 듯한 고단한 선은 표지를 덮어도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이들에게 그물망 줄이란, 살아있는 한 서로에게 영속된 시간이며, 서로가 할 수 있는, 의연한 약속일 것이다.


층층이 겹친 나의 세월도, 이들의 선과 같이 흐르고 있다. 되도록 단정하게 살아가려 애써왔지만 살아내기 위해 때마다 요란한 변신을 해야만 했다. 


선생님 딸에서 소녀로, 소녀에서 학생으로, 폴란드어를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교환 학생으로, 경영학 부전공자로, 대기업에 취직한 신입사원으로, 외국계 회사를 다니는 시니어로, 새댁으로, 초보 엄마로, 복직 후 워킹맘으로 변신해야 했다. 


그 후로 한번 더 임신, 출산, 육아라는 도돌이표를 지나고 나니 모눈종이 위에서 방향을 잃은 컴퍼스가 된 기분이었다. 이 다음 번엔  무엇으로 변신해야 할지 몰라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작업 노트 그림책 블렌딩까지 겨우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책을 펼치면, 펼침 면 정 중앙에, 움푹 파인 곳이 있다. 책 도랑이다. 내 산발 머리에서 이 이름이 나왔다. 


도랑 도랑 그림책 사이. 삶의 사이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림책을 블렌딩 하여 좋은 질문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이어가고 싶다.


아낌없는 나무처럼 나를 돌보아 주고 빈틈을 메꾸어 준 고마운 남편, 사랑하는 강준이와 민서에게 나의 첫 오디오 북, '작업노트 그림책 블렌딩'을 바친다.


앞으로 그림책 사이로 만날 님들을 그리며, 작업 노트는 계속 쓰일 것이다.


[작업노트, 그림책 블렌딩 | 작가 심 별 | 제작 나디오] 오디오북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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