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역 뺑드미에서 만난 어린이
시간이 붕 뜰 때면 주저없이 검색창을 열어 검색한다.
OO역 서점
OO역 건강빵
*건강빵 = 식사빵을 제 멋대로 부르는 나의 언어 습관 헤헤.
구미가 당기는 곳이 있는지 몇 개의 포스팅과 리뷰를 살핀 후 갈 곳을 결정하는 식이다. 주로 빵집을 먼저 검색하는데 빵집 포스팅에서 ‘아, 이곳은 가야만 해! 여기는 찐 건강빵 느낌이 나!! 건강빵 장인 느낌이 폴폴 나는데???’가 느껴지는 순간, 쿵쾅쿵쾅 빨라지는 심장박동수를 느끼며 빵집 방문을 기준으로 붕 떠버린 시간을 조직한다. 마땅한 건강빵집이 없거나 집에 먹을 빵이 충분히 구비가 되어 있다거나 빠듯한 긴축재정기를 나고 있다면 미련없이 빵집을 패스한 후 서점을 향하고, 서점도 마땅치 않으면 그냥 동네를 걷는다.
오늘도 한 시간 채 안 되는 시간이 붕 떴다. 퇴근하고 바로 약속 장소로 이동할 때 종종 생기는 일이다. 약속 시간을 딱 맞추자고 사무실에 더 있고 싶지는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검색창을 열었다.
왕십리역 건강빵
초록색, 보라색, 노란색, 청록색 네 개의 라인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그런지 꽤 많은 검색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심장박동수를 빠르게 올리는 빵집들은 ‘왕십리역’이라는 검색어가 무색할 정도로 먼 곳에 위치해 있었고, ‘이 정도면 동선이 괜찮겠는데?’ 싶으면 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빵이 아닌가 보다. 그래, 좀만 있으면 피자 먹을 건데 빵은 좀 아니지? 참자.’하면서 마지막 포스팅을 클릭했는데…
쿵쿵쿵쿵… 찾아버렸다. 꼭 가야만 할 것 같은 왕십리역 빵집!
빵집은 한산한 작은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먹고 갈 수 있는 공간 없이 포장 구매만 가능한 작은 가게였는데, 가게 폭은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설 수 있는 정도였고, 가게 문을 열자마자 빵 진열이 시작되는 매대의 시작부터 빵 진열이 끝나는 냉장 쇼케이스까지는 열다섯 걸음 정도면 충분했다.
쟁반에 빵을 골라담기 전 소금빵을 시작으로 바게트, 프레첼, 스콘, 쿠키, 베이글을 지나 크림빵까지 전 메뉴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쟁반에 빵을 담기 시작하려는데 내 뒤로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순식간이었다. 손님은 가게에 입장하자마자 성큼성큼 크림빵이 진열된 가게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말했다.
“엄마, 러스크 없다!!!”
엄마와 함께 온 어린이 손님이었다. 어린이 손님이 아니었으면 이 빵집이 러스크를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뻔했다. 내가 둘러보았을 땐 분명 러스크는 물론이고, ‘러스크’라고 적힌 빵 푯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쟁반에 소금빵을 담으며 생각했다. ‘러스크? 여기 러스크 맛집인가? 오자마자 러스크를 찾는 데엔 이유가 있겠지? 궁금한데? 아, 조금 아쉬운데?’
러스크를 즐겨 먹지도 않으면서 어린이의 말 한마디에 아쉬움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정작 원하던 빵을 사지 못하게 된 어린이는 금세 아쉬움을 털어버린 듯했다. 내가 치즈 올리브 치아바타와 시금치 치아바타 앞에서 무엇을 담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전 원하던 빵이 없어 아쉬워 하던 어린이의 말투는 온데간데 없고, 어딘가 차분하고 교양 있는 말투로 어린이가 말했다.
“엄마, 나는 프랑스 바게트를 한 번 먹어보고 싶은데?”
평소라면 ‘어린이도 바게트를 좋아하는구나!’라든지 ‘아니, 프.랑.스.바.게.트 라고 풀네임 말하는 거 너무 귀엽잖아!’라고 생각했겠지만 이것은 너무나도 점잖은 어른의 말투였다. 괜시리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공손하게 되는 어른의 말투.
“우리 바게트 하나 먹을까?” 아이의 어머니는 쟁반에 바게트 한 개를 담으셨고, 하나 남은 우유 식빵도 담으셨다. 성큼성큼 매장을 걸어 들어온 어린이는 어느새 엄마 옆에 찰싹 붙어 느긋한 엄마의 걸음걸이에 맞춰 신중하게 빵을 구경했다. 먼저 빵 쇼핑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는데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스콘이 뭐야? 응? 스콘은 무슨 빵이야?”
다시 어린이의 말투였다. 방금 전 너무나도 점잖아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어른의 말투와는 사뭇 다른, 호기심이 가득해서 빨라지고 높아져버린 어린이의 목소리.
가게를 나와 근처 공원을 향하면서 빵집에서 만난 어린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고급 빵집을 알게 되다니, 어린이 시절부터 바게트의 맛을 알고, 스콘의 존재를 알게 되다니!’ 쉽게 누군가의 행복을 재단할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멋대로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와 함께 빵을 고르고, 일찍이 맛있는 빵, 그것도 바게트 같은 식사빵의 맛을 알아 가면서 빵의 지경을 넓혀가는 아이의 삶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이다.
내 어린 시절은 피자빵과 고로케가 전부였었기 때문일까? 담백하고 쫄깃한 식사빵을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된 건 조금 아쉽지만, 피자빵과 고로케가 전부였던 시절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렇다면 왜일까? 무엇때문에 아이의 삶이 분명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엄마와 빵 쇼핑을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소금빵, 시금치 치아바타, 슈, 말차크림빵을 골라 담는 몇 분의 시간 동안 아이가 부러웠나보다. 맛있는 빵을 먹을 때면 이상하게도 아빠 얼굴보다는 엄마 얼굴이 떠오르곤 했으니까. 엄마 얼굴이 떠오를 때는 꼭 ‘엄마한테 이 빵 알려주고 싶다.’라던지 ‘엄마랑 이 빵 같이 먹고 싶다.’라던지 ‘엄마도 이 빵 좋아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따라왔다. 엄마는 빵보다도 떡을 더 좋아했는데 말이다. 뭐, 맛있는 건 장르를 불문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기 마련이니까.
어린이 공원 벤치에 앉아 소금빵을 딱 절반만 먹었다. 윗면은 담백하면서 쫄깃쫄깃하고, 아랫면은 버터와 함께 파삭하고, 빵 안쪽은 결을 따라 부드러운 것이 도통 절반만 먹고 절반을 넣어 두기 어려운 빵이었지만, 곧 먹을 피자를 떠올리며 빵봉지를 닫았다.
빵 봉지를 뚤레뚤레 들고 어린이 공원을 나서는데 맞은 편에서 같은 빵 봉지를 든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빵 봉지를 든 엄마와 킥보드를 타고 엄마 옆을 따르는 어린이. 말 없이 걷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평화롭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저 빵 봉지에 든 빵이 모자의 주말 아침을 책임질까? 어린이에게 프랑스 바게트는 어떤 맛으로 기억될까?
오늘부터 시작되는 모자의 어린이날 휴일이 빵과 함께 평화롭기를, 빵과 함께 행복한 기억이 두 사람에게 켜켜이 쌓여 가기를, 이라고 두 사람을 등지고 걸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