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롯데몰에서 만난 반가운 이성당
잠실역까지 1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인터뷰를 하며 쌀로 만들었다는 유명한 말차 케이크를 먹었고, 근처에 <또간집> 잠실 편에서 우승했다는 쌀국수 가게가 있다기에 인터뷰이 선생님과 식당에서 제일 든든하다는 ‘차돌박이 양지 도가니 쌀국수’까지 먹고 나온 참이었다. 배가 부를 만치 불렀다는 말이다.
인터뷰도 순조롭게 마무리지었겠다, 밥도 맛있었겠다, 기분 좋~게 집에 가기만 하면 완벽한 하루가 될 터였다. ‘퇴근 시간이라 지하철에 사람 많으려나?’하는 걱정이 잠깐 스쳤지만, ‘7시 넘었으니까 지옥철은 아니겠지.’하며 잠실역 방향으로 걸었다. 내 바람이 부디 들어 맞기를 바라면서.
아직 밝은 하늘, 선선한 바람, 석촌 호수에 떠 있는 라프라스와 피카추. 퇴근길이 나들이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들뜸이 +1씩 추가되는 것 같았다. 집에 가고 싶은데 집에 가기 아까운 이 기분. ‘그래, 오랜만에 잠실까지 나왔는데 그냥 가기는 조금 아깝지.’ 스마트폰 지도를 꺼내 근처 베이커리를 검색했다.
잠실역 빵집
스크롤을 내리는데 단숨에 마음을 뺏겨버린 세 글자 ‘이.성.당’. 추억의 ‘이성당’이 두 곳이나 떴다. 대학 시절, ‘단팥빵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으려고?’ 반신반의하며 친구 손에 끌려 갔다가 단팥빵은 물론이고, 소프트콘 아이스크림과 밀크쉐이크에 반해버려서 군산에 들를 때마다 종종 가던 빵집 이성당! 전국을 휩쓰는 유명 빵집 대열에 이름을 올리더니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현위치에서 500m도 채 되지 않는 곳에 이성당이 있다는데 나들이 같은 완벽한 퇴근길의 기분, 온도, 습도… 이성당에 가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롯데몰 6층 이성당. ‘빵이 다 떨어졌으면 어쩌지?’ 걱정하며 매장에 들어섰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매장 자체가 커서 그런지 마감 시간인 것을 감안했을 때 빵 종류도, 수량도 넉넉히 남아 있었다. 먼저 매대 한 바퀴를 돌면서 어떤 빵들이 남아 있는지 스캔을 한 후,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와서 신중하게 빵을 담기 시작했다. 쌀국수로 든든하게 식사를 했기 때문인지 달달한 디저트빵이 눈에 들어왔다. 육안으로만 봐도 ‘여기 엄청 빵빵하게 내용물이 들어 있어요!’를 알 수 있는 묵직한 생크림단팥빵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언젠가 군산에 다녀온 아연이 말이 생각나서 흑임자구운모찌와 찹쌀구운모찌를 한 개씩 집었다.
(아연 왈)“얘들아, 앞으로 이성당 가면 무조건 흑임자구운모찌야. 알겠지?”
오늘의 이성당을 있게 한 단팥빵과 야채빵도, 요즘 빵순이들 살찌게 하는 주범이라는 소금빵도, 언제나 옳은 마늘바게트와 깜파뉴도 몽땅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선물 받은 파리바게트 기프티콘으로 주말에 양껏 쟁여 놓은, 작은 자취방 냉동실과 냉장실에 꾸역꾸역 자리한 29,000원 상당의 빵들을 생각하며 겨우 겨우 절제력을 발휘했다.
홍대입구역으로 가는 2호선 열차 안, 다시 한 번 절제력을 발휘해야 했다. 생크림단팥빵이 뭉개지지 않도록 빵 봉투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으면서 말이다. ‘아니야. 이거 오늘 먹는 거 아니야. 이거 오늘 먹을 거 아니야. 오늘은 이미 끝났어. 워워 진정해.’ 이미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상태였고, 집에 가면 달리기도 해야 했다. 어제 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쌀국수도 소화되지 않았는데 빵까지 먹으면 절대 뛸 수 없는 상태가 될 게 뻔했다. 하지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난다고 했던가! 눈을 질끈 감으며,‘오늘 먹는 거 아니야.’ ‘오늘 먹는 거 아니라고 했다.’ ‘그만 해라.’ 생각하며 속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할수록 반작용으로 ‘먹고 싶어! 먹고 싶어!! 먹고 싶다고!!!’하는 소리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오는 길, 가방에 조심스럽게 모양 잡고 있던 빵 봉투는 어느새 내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빵 봉투를 열어 빵들이 잘 살아 있는지 생사 확인을 하고 있었다. 봉투 안에 담긴 생크림단팥빵, 흑임자구운모찌, 찹쌀구운모찌에 별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발이 달려 도망갈 일이 결코 없는데도 빵 봉투를 열어 자꾸만 빵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빵 세 개를 나란히 꺼냈다. 빵빵한 생크림단팥빵, 까만 흑임자구운모찌, 하얀 찹쌀구운모찌. 그러고는 깊은 심호흡과 함께 빵 하나를 천천히, 경건하게 꺼냈다. ‘딱 하나만! 딱 한 입만!’ 생크림단팥빵을 열어버렸다.
나이프를 꺼내 빵의 중심을 콕 찍었다. 그리고 그대로 빵끝의 한 점으로 칼을 찍어 내렸다. 이렇게 빵의 반지름을 따라 한 번 잘라준 후, 다시 빵의 중심을 콕 찍었다. 이번에는 먼저 자른 반지름으로부터 약 45도 정도 벌려서 빵끝의 다른 한 점으로 칼을 찍어 내렸다. 전체 빵의 ⅛ 크기로 한 조각 완성됐다.
얇은 빵피, 주체 못하고 터져 나오는 생크림…. 호흡을 가다듬고 먼저 칼에 묻은 생크림과 단팥 페이스트를 진득하게 혀로 핥았다. 아! 이 설탕의 맛!! 혀 끝을 시작으로 손끝, 발끝, 머리 끝까지 삽시간에 퍼져 나가는 이 설탕의 맛!!!
나눠서 베어물 게 없을 정도로 작은 ⅛ 조각이지만, 작게 작게 한 입씩 나눠서 베어 물었다. 작은 한 조각을 최대한 오래 음미해야 빵 한개를 다 먹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문 순간, 불길함을 직감했다. 얇고 촉촉한 빵피, 오일리 하지 않고 몽실몽실 가볍고 부드러운 생크림, 알갱이 없이 부드럽게 으깨진 달달한 단팥 페이스트 트리오가 입안에서 어우러질 때 맛을 음미하는 순간 순간이 황홀했고, 황홀한 만큼이나 고뇌가 깊어졌다. ⅛ 조각에서 멈출 자신이 전혀, 절대 없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잘라 놓은 ⅛ 조각을 해치웠다. 그리고 나이프를 손에 들고 고민을 하다가, 일단 나이프를 내려 놓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으면 뛰러 나가고 싶은 마음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름 엄청난 의지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하지만 생크림단팥빵 앞에서 이 정도의 의지력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한 조각만 더 먹으면 뛰러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절대 아니! 한 조각이 두 조각 되고, 두 조각이 빵 하나가 된다고!’
‘집 오는 길에 겨우 배가 꺼졌는데 이거 먹고 대체 언제 뛰겠다는거야?’
하는 마음의 소리들을 누르고 막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것 역시 엄청난 의지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여보세요.”
“경은아, 언니 고민이 있어.”
“뭔데? 나 바빠. 과제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고.”
과제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는 동생을 붙잡고는 빵을 먹는 게 좋을지, 달리기를 하러 가는 게 좋을지 자문을 구했다. 막내는 언제나 그렇듯, 아홉 살 위인 언니의 하찮은 고민을 심드렁해 하면서 다 들어줬다. 그러고는 말했다.
“빨리 운동하러 가.”
귀찮아 죽겠다는, 그렇지만 짜증은 절대 내지 않는 막내의 대답. 이상하게도 막내의 대답을 듣자 빵을 먹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 막내랑 전화하는 1-2분 새 달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경은아, 언니 고민이 하나 더 생겼어.”
“뭔데? 빨리 말해.”
“생크림단팥빵을 냉동실에 넣어 놓을까? 냉장실에 넣어 놓을까?”
막내는 이전보다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냉장실. 나는 빵 냉동실에 넣는 거 진짜 싫어!”
전화를 끊고, 생크림단팥빵을 빵 봉지에 고이 넣어 냉장실에 넣었다. (구운모찌 두 개는 내일 아침에 먹고 싶어질 지도 모르니 하나는 냉동실에, 하나는 실온에 꺼내 두었다. 떡은 냉장고에 넣으면 굳으니 냉동실에 보관해야 한다.) 그러고는 머리끈을 챙겨 런닝화를 신고 홍제천으로 향했다.
많이 먹은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2km를 갔다가 다시 2km를 돌아오는 코스인데, 아직 채 반환점에 도착도 하기도 전에 반환점을 돌고 온 것 마냥 다리가 무거웠다. ‘걸을까? 크림빵을 참고 여기까지 나온 것만도 대단하잖아? 걸어도 될 걸?’ 하는 유혹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유혹의 목소리를 떨쳐냈다.
‘안 돼! 나는 지금 크림빵을 참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다!!’
반환점을 돌자 그제야 몸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한 발 한 발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바람과 함께 달리는 이 상쾌함. 한 발 한 발 리듬을 따라 마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크림빵을! 참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어! 나는!! 크림빵을!! 참고!! 달리기를!! 선택했어!!!’
터질 듯이 생크림단팥빵을 꽉 채운 크림 만큼이나 빵빵하게 뿌듯함이 차올랐다. 오늘 나, 멋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