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우리는 정주행 중

영화동아리와 데이트 사이

by 쑥자람

“너는 주로 데이트 때 뭐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내 연애를 궁금해했다. 남자친구와 주로 언제 만나는지, 데이트 때는 뭘 하는지 듣고 싶어했다. 하지만 내 대답은 별 게 없었다. 친구들은 듣자마자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나를 놀렸다.


“잠깐만 잠깐만… 너네 사귀는 사이 맞으세요? 그냥 영화 동아리 아니세요?”


우리 데이트는 늘 똑같았다. 우리만의 패턴이자 평화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집에서 하루종일 OTT 보기.

집 데이트를 하면서부터 우리 둘의 OTT 정주행이 시작됐다. 금요일 밤이면 늦은 저녁을 차려 먹고는 팝콘 한 봉지를 들고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았다.


“준비 됐어?”

“그럼!”


그렇게 자정까지 영화를 보다가, 다음날 늦게 일어나 간단히 아점을 먹고, 다시 영화를 봤다. 슬슬 눈이 감기면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 와 화면 앞에 앉았다. 문은 좀처럼 간식에 손을 안 뻗었다. 간식에 손을 뻗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나는 잠을 쫓을 겸, 번갈아 가며 우리 입에 과자를 날랐다. 그러면 문은 아기새처럼 입을 ‘아’하고 벌려 오물오물 받아 먹었다. 그러다 슬슬 눈이 감기면 낮잠을 잤는데 눈이 감기는 쪽 역시 언제나 나였다. 일어나 저녁을 차려 먹고는 어김없이 또 영화 시청. 이게 우리 데이트 루틴이었다. (적고 나니 친구들이 왜 영화 동아리냐고 물어봤는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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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본 건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진격의 거인>이었다. <진격의 거인>을 보기 시작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아직 연인이기 전 서로를 탐색하던 때, 그와 나눈 대화들은 대체적으로 흥미로웠다. 성향이며 취향이며 다른 게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영화 취향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공통으로 시청한 작품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다.


문은 마블 시리즈의 굉장한 팬이었고, 웬만한 박스 오피스 영화들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읊는 영화들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영화라면 디즈니, 픽사, 지브리의 몇 편의 애니메이션과 아주 극소량의 한국 독립 영화가 전부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 들어는 봤던 것 같은데…’ 말고는 없었다. 대학 도서관 입구에 떡 하니 서있는 ‘교양 권장 도서 100권’ 목록처럼 한 번쯤 봤을 법 한 영화(이를 테면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를 한 개도 보지 않은 게 신기한지 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은숙님 영화 안 좋아하세요? 주로 뭐 보셨어요?”


나는 <인사이드 아웃>, <코코> 같은 픽사를 훑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조금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문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오, 이제 말이 좀 통하는군?’


일본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말이 통할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았다.


“제일 감명 깊게 본 일본 애니메이션이 뭐예요?”

“진격의 거인이요.”

“...?”

당연히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대동단결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분위기 <진격의 거인>…? 눈치없이 진격하는 이 대화 주제 뭔데….


나에게 <진격의 거인>은 기괴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알몸의 거인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사람을 잡아 먹는 장면을 어딘가에서 본 후로 절대 볼 일은 없겠다고 생각한 것은 물론 ‘저런 걸 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인걸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와버렸다. <진격의 거인>.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유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문에게 물었다.


“<진격의 거인> 어떤 부분이 감명 깊으셨어요?”


그러자 한참을 고심한 그가 하는 말.


“진격의 거인은 사랑 이야기에요.”


해괴한 거인들이 뛰어다니고 식인을 하는 그게 사랑 이야기라고? 높은 확률로 예상해보건대 그때 분명 나의 포커페이스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말을 덧붙였겠지….


“진짜예요! 절절한 인류의 사랑 이야기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진격의 거인>과 ‘사랑’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날로 집에 돌아와 <진격의 거인>을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리즈가 4기까지 이어지는, 대하드라마에 버금가는 대장정을 끝내지 전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데이트로 같이 보게 된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 <진격의 거인>이 되버린 것이다.


문은 다시 봐도 명작이라며 예찬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그가 ‘사랑이야기’라고 했는지 어렴풋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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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영화, 같은 애니메이션을 함께 본다는 건, 둘 사이에 공통 분모를 만들어 가는 일이었다. 같은 장면에 웃고, 같은 장면에서 울기도 했다. 때로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서 “그게 뭐야?”, “그것도 안 봤어?” 같은 어색한 물음표는 점점 사라져갔다.


우리가 함께 정주행한 것 중 가장 거대한 프로젝트는 마블 시리즈였다. <진격의 거인>과 마찬가지로, 나는 마블과는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2008년부터 이어진 방대한 시리즈에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도 몰랐고,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흥분하는 지인들이 좀 과장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마블을, 문과 함께 <아이언맨>부터 차근차근 보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다 놓친 장면도 많았지만 괜찮았다. 옆자리에는 언제나 다정한 해설사가 있었으니까.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니 나도 이제 인피니티 사가와 멀티버스 사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하나 아는 게 많아질 때마다 문은 ‘오구오구 이제 이것도 알아?’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렇게 <진격의 거인>에서 시작된 우리의 정주행은, <아이언맨>으로 넘어가 마블 유니버스를 통과했고, 어느새 서로의 우주로 진입해 있었다. 서로를 전혀 몰랐던 두 사람이, 화면 속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조율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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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나니 데이트 거리가 하나 늘었다. 마블 영화 개봉일에 맞춰 극장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것. 마블 영화 개봉일엔 특식이 나오는 날처럼 들떴다. ‘오늘은 어떤 팝콘을 먹지?’ 신중하게 팝콘을 골랐고, 손에는 콜라, 품에는 팝콘을 안고 입장해선, 늘 영화 시작 전에 다 먹어치웠다. 이제는 그 루틴도 영화의 일부 같았다.


문은 퇴근하자마자 우리 동네로 넘어왔다. 그가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그래서 가방을 후딱 내려 놓고 모바일로 영화부터 예매했다. 그러고 나서야 한숨을 돌리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손을 잡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영화관으로 가는 길이 간질거렸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서 그런 탓일까.


“오빠! 우리 오늘 엄청 부지런하다! 이 시간에 우리가 밖에 있다니!”

“그러게~ 심지어 영화 보고 나오면 오늘 끝나있어! 우리 밤 새고 집에 들어가는 거야~”


미주알고주알 농담을 주고받으며 영화관에 도착했다. 문이 간식을 주문하는 동안 나는 포토티켓을 수령해왔고, 나란히 상영관으로 입장했다. 영화를 보다말고 내쪽으로 귓속말을 할 것처럼 내쪽으로 가까이 왔다. 나는 그에게 귀를 가까이 내밀었고, 그는 내 관자놀이에 뽀뽀를 했다. 이날 설렌 건 나뿐이 아니었나보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 편의 마블 영화를 정복했다. 나는 눈가를 훔쳤고, 그는 나를 훔쳐봤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결국 먼저 말한 건 나였다.


“근데 진짜… 너무 슬프지 않았어?”


문은 대답 대신 웃었고, 나는 그 웃음에 또 삐쳤고, 그 삐짐이 귀엽다며 또 놀렸다. 집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우리 둘 다 까만 티셔츠 위로 눈이 내려 있었다. 둘 다 갈릭 팝콘 시즈닝을 우수수 흘린 것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하하 웃으며 서로 옷을 털어주고는 영화관을 나왔다.


이건 그냥 영화 동아리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장르를 끝까지 정주행 중인 중이다. 울고 웃고 또 울고, 엔딩 크레딧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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