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 줄어들 것이라고(서로 포용성이 넓어지기 때문에)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것은 나의 여러 이상향들 중 하나였을 뿐. 되짚어보니 자기방어든 상대 보호 차원이든, 그냥 웬만한 일들은 넘기는 것이었을 뿐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매 순간 느낀다.
내 생각과 기준은 오롯이 나만의 것, 타인과 확연히 달라 상대방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헛다리 짚을 때도 빈번하며 심지어는 그 순간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 부정적 감정들이 무엇으로부터 기인되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조차도 많다.
나의 데칼코마니들과 같이 살아가지 않는 이상,(혹은 그렇다 할지라도)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미 인지하였던 점이고 이에 대한 나의 돌파구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빠르게 찾아 그 부분을 상대방과 타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 관계에서 나는 상대방을 통해 이런 갈등 속에서 두드러지는 나의 결핍된 특성을 찾았다. 사실 이 특성이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마, 얼핏 듣기로는 다른 많은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은 이 특성을 서로 발동시키고 있었던 것 같지만 최소 내가 맺었던 관계에서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이 점을 확연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아마 나의 뚜렷한 결핍이 상대의 이 특성을 발동시킬 의지조차 상쇄했을지도 모르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오고, 다른 가치관을 확립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며 살아온 두 사람이 다른 의견으로 대립된 상황에서, 특히 그 쟁점이 날카롭고 분위기가 무거울수록, 서로에게 '우리의 생각이 이토록 다르지만 난 지금 이 순간도 널 애정하고 있어.'라는 표현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의 삶을 돌아보자면, 나의 최초의 인간관계인 우리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에서의 답은 'X'이다. 부모님과 같이 동거한 20여 년의 나의 청년기를 생각하면 '갈등=대립=풀릴 때까지 서로 냉랭하게 있어야 함'이란 공식이 성립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부모님은 언제든 날 사랑한다.'라는 왠지 모르게 세뇌된 문구가 마음속에 콕 박혀 '이 상황 어딘가에도 애정이 있겠지.'라며 희미한 발자취를 찾아 헤매듯 더듬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집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 건네야 하는 대화로 조금씩 냉랭함이 온기로 변해갔던 기억뿐, 냉기 속에서 내 마음을 지탱해 줄 온기를 찾진 못 했던 것 같다.
그 외의 다른 관계들, 연인,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느꼈던 것은.. 사실 잘 모르겠다. 갑자기 든 궁금증인데 다른 사람들은 대립 상황에서 어떤 언어적 그리고 비언어적 태도로 상대방을 대할까?
어쨌든 지금의 난 그런 사람과 마주했다. 아무리 서로 대립각을 세워도 상대방이 날 애정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난 이런 점에서 이 사람이 크게 보였다. 나는 사실 어느 갈등 상황에서도(내 잘못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잘못인 상황에서도) 먼저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은 삶을 지향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내가 생각하는 '멋진 어른으로서의 자세'여서 행동으로 옮겼을 뿐 그 안에서 내가 진정한 애정을 상대방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진정성이라는 것은 꾸며낼 수 있지만 결국은 간파당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이것저것 가져다 붙여도 진정한 마음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 아무리 의심하고 자세히 뜯어보아도 결국 남는 건 참일 뿐 거짓은 없기 때문에 상대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얼마나 진정성 있는 태도로, 진정 꾸미지 않은 포용력으로, 애정으로 타인을 대했던가?
어떤 갈등은 나를 고뇌로 빠트리기도 하지만 어떤 갈등은 이렇게 나에게 무언가를 남긴다. 관계에서 사랑과 애정을 느끼고 나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되어서, 나 또한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선망하게 만든다. 이제 내 삶에는 새로운 선택지들이 추가될 것이다. 사람보다 집을 더 좋아하는 또 한 명의 히키코모리인 내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마주하는 새로운 이유를 또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