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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펠 Jul 21. 2023

2023년 12월 31일에 있는 나에게 (2)

토막 일기 - 2월

2023년 2월 1일

- <8월의 크리스마스>


“아저씨는 결혼 안 하세요?”

“벌써 애가 둘이야.”


죽을 날을 받아놓고 하는 사랑은 어떨까.

노리끼리한 필름 안에서 추억이 될 수 없는 사랑은 애당초 시작도 말라면.

내가 정원이면. 시한부 선고를 받는 그날부터 아주 마음껏 사랑해야지. 최대한 많이 사랑해서 최대한 많은 이별을 해야지. 그래서 내 장례식을 온통 나의 심은하들로 가득차게 만들어야지. 오지 않는 한석규의 유리창을 깨는 심은하들로. 내가 진짜 사랑한 사람이 누군지 <맘마미아>의 아버지 찾기, <응답하라> 시리즈의 남편찾기처럼 맞춰보라고, 분홍 옷을 입고 온 사람들아. 나는 분홍색 장례식을 할거거든





2023년 2월 6일

- 낯선 사람과 마시는 위스키는 짭짤해


시가렛 애프터 섹스 공연에는 주류 반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콘서트 한 줄 관람평.


콘서트 끝나고 안이랑 같이 캔맥 하나씩 까면서 깔깔 거리니 청춘영화가 따로 없더라.

콘서트장 앞에 있는 씨유 편의점에서 섹후땡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복습했다.

시가렛 애프터 섹스 공연에 시가렛이 없어서 아쉽다고 징징거리는데

옆 테이블 남자가 자기 담배 하나를 준다.


그로써 완벽해진 Cigarettes after Sex의 밤


그러다 합석해도 되냐고 묻길래 오케이, 했다.


그 남자는 섹후땡을 생각하면 한석규가 나오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고 했다.

마침 내가 이틀 전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는데 말이지.

그 얘길 해주니 눈빛에 멜로가 한층 두꺼워지는 것을 나는 목격해버렸다.

"섹후땡 좋아하는 여자 처음 만나요."

기도 안 찬다. 거기 널린 게 섹후땡 좋아하는 여자였다.


다시 콘서트 얘기로 돌아와서

보는 내내 딴 생각을 하게 되는 콘서트는 처음이었다.

밥솥 오빠 덕분에 처음 이 밴드 노래를 알게 됐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세상 사람들 이 좋은 노래를 어떻게 나만 빼고 듣고 있었는지...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조와 헤어지고 <K.>를 질리도록 들었던 베를린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정용화 보겠다고 서울로 기차 타고 왔던 인생 첫 콘서트도 떠올렸다가,

졸업 시험은 어떻게 하나 현실적인 걱정도 하고,

듣다 보니 배고파서 낮에 인규가 해장한다고 먹은 선짓국 생각도 하면서.


시가렛 애프터 섹스는 어떻게 이름도 시가렛 애프터 섹스인가 생각하다가

나는 어떻게 이름도 봄인가 하는 이상한 생각도 한다.

어제가 입춘이었다. K-조상님들은 천재인가.

입춘이 지나자 편의점 바깥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셔도 괜찮은 날씨가 된 것.

어쩌다 이름도 봄인 나는 봄이 오면 조증 걸린 사람처럼 실실 웃고 다닌다.

근데 올해는 좀 빠르다. 실실 웃으면서 갔다가 실실 웃으면서 돌아온 섹후땡 콘서트 후기 끝.





2023년 2월 8일

- 살아


아직 그럴 날씨는 아니었는데 마음이 급해서 반팔 니트 원피스를 입고 나간 2월 초,

오래된 영화를 봤다.

우리가 태어난 해에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스물 다섯 아래로만 만난다는 미국 남자의 전성기 시절 영화

세 시간 반짜리 평점 9.8의 영화


시청역에서 환승을 하고 용산역에서 내릴 때까지 열심히 봄 노래들을 모았다.

너는 오자마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했다. 빨개진 귀.

경부 고속도로 사고로 차가 밀렸다는 말에 '그런 돌발상황까지 예상해서 빨리 나올 만큼의 마음은 아니었나 보지' 하고 말도 안되는 서운을 느끼다가 '버스 차선으로 달리면 벌금이 얼마 나올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는 그 믿을 수 없는 말에 또 금세 마음이 풀리고.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는 잘 울지 않는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를 살리려고 구명보트에서 뛰어내리는 로맨틱한 여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나를 가장 사랑해서 늘 나를 지키기 바쁜 나로서는.


침몰하는 배 안에서 차갑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니 세월호에서, 그리고 이태원에서 차갑게 고통받았을 내 또래 사람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그때 한 번 코를 삼켰고. 스물다섯,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늘 영화관에서 처음 만난 남자가 그 차가운 사월과 시월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또 코를 킁하고 먹었다. 그건 정말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코먹음이었다.





2023년 2월 9일

- 술김에 쓰는 글


언젠간 제대로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베를린 테겔 공항을 떠나면서 다시는 꺼내보지 않으려고

거기 그대로 버리고 왔는데

'두고 가신 짐이 있으니 꼭 다시 찾으러 오라'고 한 달에 한 번 연락을 주는

끈질긴 공항 직원 같다 나의 우울은.





2023년 2월 19일

- 체체파리와 얼룩


아프리카 체체파리한테 물리면 피를 빨리다 무슨 병에 걸려 죽는대.

근데 체체파리가 물 수 없는 유일한 동물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아픈 가시가 있는 고슴도치?

딱딱한 가죽을 가진 악어?

지능이 높은 인간?

땡땡 우리는 달리는 차 안에서 한참 스무고개를 했지


하얗고 까만 줄무늬가 있는 얼룩말이야.

기울어진 줄무늬가 파리의 비행 위치를 착각하게 하고 정확한 안착을 방해해서 그렇다네.


나를 기다리면서 거실에서 다큐를 봤다고,

당신이 들려준 체체파리와 얼룩말 이야기


체체파리를 피해 몸을 줄무늬로 만든 얼룩말을 보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얼룩말 타투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



* <심장에 수놓는 이야기> - 구병모

자연의 어느 부족에서는 사자의 장례를 치를 때 그의 영혼이 들고나는 통로를 마련해주고자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그런 여러 가지와 구실이 오랜 옛날부터 있어온 거라면, 자신을 수호하는 용도의 문신이 있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2023년 2월 19일

- 유병록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망설이다가>


봄은 가고 여름이 와요.

그 여름에 당신은 없어요.

망설이지 말라고 말해주는 당신은 없어요.

...

망설이는 건 자꾸 멍청이 같아서.


사람을 놓치고 기회가 지나갈 때까지 머뭇거리고 사랑을 빼앗기지만

망설이는 건 가끔 설탕처럼 달아서.


우리 무관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그네와 나만 흔들리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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