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펠 Nov 06. 2023

재즈 영화 속 주인공을 질투하는 가을을 보냄.

영화 <블루 자이언트>

가을을 보낼 준비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났는데 여태 가을이 안 갔다.



잠시 왔다 갈 때는 아쉬워서 붙잡았었는데

막상 또 오래 있겠다 하니 반갑지가 않다.



이제는 슬슬 톰보이 코트도 꺼내고 싶고

이씨씨 강의실에 앉아서 눈 오는 풍경도 보고 싶은데

다음 주에는 진짜 가겠지 너도 눈치가 있으면.







어제는 지혜랑 <블루 자이언트>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

신촌에 있는 영화관에 갔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열여덟 살 남자 애들이 만든 재즈 밴드 이야기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왼쪽에 앉은 지혜의 오른팔과 오른쪽에 앉은 모르는 남자의 왼팔이 볼 앞을 바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나는 자, 울어라! 하고 만든 마지막 장면보다

영화 중간에 혼자 먹먹해져서 열심히 극장 천장을 노려봤다.

슬퍼서 운 게 아니라 부러워서.






블루 자이언트의 주인공 '다이'는 재즈에 빠진 정도가 아니라 재즈에 완전히 미쳐 있다.

재즈에 살고 재즈에 죽는, 재살재죽...

밤낮으로 재즈 생각뿐인 다이는 재즈를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을 느낀다.




"너는 한 번 죽어봐야 해"

"넌 무대 위에서 수십 번, 수만 번 죽어야 돼"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을 찾아 온몸으로 뛰어드는 주인공이 부럽고 질투가 나서 속이 근질거렸다.





영화가 끝나고 단골술집 ‘소규모 술식당’에서 가브리엘이랑 얘기를 하다가 나는 가끔 삶이 귀찮다고 말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나는 내 삶을 사랑하기는커녕 하청업체 심부름꾼처럼 살아왔다.

점수를 받으려고 꾸역꾸역 해내는 숙제처럼 심부름처럼





박노해 -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재즈를 사랑한 다이처럼 죽을 각오로 사랑할 수 있는 일은 못 찾더라도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려야지

평가를 기다리는 숙제로 살지 말고

순간순간을 붙잡아 두는 여행으로 살아야지





또 월요일이다.

삶을 대하는 이런저런 다짐들을 적다가도

내일이면 또 카페에 박혀서 면접 준비를 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겠지만

다이랑 슌지 그리고 유키노리가 말아주는 재즈를 들으면서

신나게 살아봐야지







+ 지혜랑도 얘기했지만 왠지 재즈는 겨울이다. 베를린의 지그재그바가 그립지만 서울의 재즈바로도 충분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버정에서 울게 되는 날에 나는 하던 일을 멈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