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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잃어버린 현대의학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1923년 12월 파리에서의 초연 이후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계 곳곳의 연극 무대에 오르는 쥘 로맹의 희곡 ‘크노크, 어쩌면 의학의 승리’. 극도로 민감한 의학 자본주의와 군중 통제의 이면을 다뤘는데, 코로나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오며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요즘 말로 역주행을 하고 있다.

작품 속 크노크는 사익에 가득 찬 돌팔이 의사의 전형이다. 질병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선량한 마을 사람에 공포심을 심어주려 한다. 주민들을 잠재적 환자로 규정하며 비과학적이며 허구에 가득 찬 그의 의학적 선동은 나치의 괴벨스를 절로 연상시킨다. 크노크의 프로파간다는 탐욕적이며 효과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에게 생명에 대한 위협만큼 두려운 것은 없을 터이니. 이런 대사가 있다.

“우리가 청중에게 바라는 것이 바로 그들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효과입니다. 선생님도 차츰 익숙해지실 겁니다. 사람들은 이제 발 뻗고 잠들지 못할 겁니다. 질병이라는 벼락을 맞고서야 깨어나는 식으로, 안전 감각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잠드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과오거든요.”





100년 전 연극 ‘크노크…’ 충격

이윤 추구에 합리적 사고 마비

환자보다 질병 중시하는 역설

만연한 의료상업주의 혁신해야



평화로운 마을이 존재하지도 않는 질병에 맞서 과장된 치료에 몰두하는 의학의 전체주의 사회로 변모한다. 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신뢰에 더해진 크노크의 선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사악한 지식으로 무장한 인물과 대면하자 평소의 합리적 사고는 마비된다. 있지도 않은 질병에 포박당한 후 무기력한 환자로서 의사 앞에 복종하는 희곡 속 이야기는 검증되지 않은 의학 정보에 현혹되는 오늘날의 세태와 오버랩된다. 두려움과 선동에 사로잡힌 대중이라면 언제든 시대를 초월해 또 다른 크노크에 걸려들 것이다.

크노크의 혹세무민은 의학을 종교적 숭배 차원으로 승격시키고, 의학의 이익이 마을의 이익임을 강제한다. 그러는 사이 역설적이게도 아프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증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람들의 정신까지 통제하고 마을 전체를 질병에 천착하는 거대한 병동으로 만들어 가는 모습은 오늘날 의료기술을 활용한 기망이나 수익에 몰입한 과잉진료 차원의 현실과 잇닿아 있다. 의료인으로서 깊이 성찰할 대목이다.

현대의학이 ‘환자’보다 ‘질병’에만 매달리는, ‘인간’ 중심이 아닌 ‘질병’ 중심의 의학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인체의 병든 부분에만 집중하는 현대의학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진통제를 복용해서 통증은 줄었지만 위장병을 얻거나, 항생제로 바이러스는 제압해도 간질환을 얻거나, 암세포를 죽이느라 착한 세포까지 파괴하는 의학적 역린은 어찌해야 하는지 현대의학은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의학적 권위와 의료시장이 근본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지 오래다.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는 의사의 시장지배력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의사는 근대적 기업의 통제에서 자유로웠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고백건대 의료 상업주의는 의료계 전반에 만연해 있다. 과잉진료를 당연시하며 의사는 이윤 추구에 쉽게 노출된다. 노화에 따른 신체의 자연스러운 변화와 정상적인 행동이 크노크의 선동처럼 심각한 병적 현상으로 바뀌면서 진단명이 붙고 값비싼 치료제가 당연시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고단한 의료현장을 지키면서 환자 본위의 진료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야 하는 의료인들은 이럴 때마다 무기력해진다.

현대의학은 과학적 속성을 얻는 대신 인간의 모습을 잃어왔다. 과학기술에 의존하다 보니, 고통받는 환자를 위로하고 격려해 치유의 힘을 배가하는 의료의 본령은 소홀히 했다. 과학기술이 의학의 중심이 되고 경제논리가 의료계를 지배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가슴 처연한 일이다.

100년 전 작품이 마치 현재의 의료환경을 보는 듯한 기시감을 주는 것은 왜일까. “당신은 보균자니 지금부터 침대에서 쉬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환자다”라고 속삭이는 연극 속 크노크의 확신에 찬 목소리 때문은 아닐까. 나아가 의료광고와 야릇하게 조화를 이루며 건강한 이들조차도 환자일 수 있다며 자기최면을 거는 건강염려증의 시대 속에 확장되는 의료 상업주의 현실 때문은 아닐까.


질병에 맞선 인류에게 진정한 의학의 승리는 무엇일까. 보편적 시민의 건강한 삶이 이기심에 가득 찬 이들에 의해 집단으로 조정되고 개량되는 혹은 이용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현대의학의 성과에 도취해 자본적 문제와 의학의 한계마저 외면한다면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공동체에도 종국에는 해악이 된다. 크노크의 교활한 선동이 유효했던 것은 의학에 대한 객관화 부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번 글은 욕 좀 먹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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