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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규리 Sep 02. 2021

나의 뉴욕

 휴학 없이 졸업을 하고, 대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나마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의 면접에서 떨어진 후였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며,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참으로 답답했다. 26살에도 하고 싶은 게 없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채 조교실에서 갈등하던 나는, 버릇처럼 좋아하는 여행을 가기로 다짐한다.


 고민 끝에 미국을 택했고, 이는 다시 동부와 서부로 갈렸다. 한적한 웨스트 코스트(West Coast)를 느끼고 싶어 서부를 계획을 하다가, 갑자기 미국을 횡단해보기로 한다. 빌딩 숲엔 흥미가 없었지만, 이참에 ‘세계의 수도’라는 뉴욕을 경유하기로 한 것이다.


 24시간 사이렌이 울리고, 전광판이 꺼지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했지만, 그토록 혼자였던 여행은 뉴욕이 처음이었다. 하이라인 파크와 브루클린 브릿지, 윌리엄스 버그 등에 갈 때마다 아름다움 뒤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웬일인지 혼자인 것이 그리 편치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대만족이었다. 그 도시에서 무얼 했길래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빼곡한 빌딩 사이를 속속들이 누비던 그 시간은 한국에 돌아온 후로도 꽤나 긴 여운을 남겼다. 뉴욕에서의 기억은 생각보다 일상 곳곳에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었던가, 우연히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 대한 묘사가 나왔을 때였다. 나는 그곳이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곳의 건널목은 어떠했으며 그곳의 사람들과 조명은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냈는지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미국 특유의 거대한 네온사인이 요란했고 그에 걸맞는 소음이 어우러진 곳. 나는 그렇게 책 속에 흠뻑 스미어 들었다.


 책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영화 <섹스   시티>  때에도 내가 갔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가 배경으로 나온 적이 있고, <스파이더 > . 말할 것도 없다. 브루클린 브릿지와 크라이슬러 빌딩, 보통의 거리들까지 뉴욕이라는 배경이 하나의 볼거리인 영화이지 않나.  외에도 <블랙스완> 혼신을 다해 공연했던 링컨센터의 계단에 걸터앉아 생애  에어팟 박스를 풀었고, <위플래시>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오르고 싶어 했던 무대도 뉴욕의 카네기홀 주변도 빠짐없이 걸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본 위에 어딜 가나 온갖 인종과 성향으로 붐비는,  거대도시 곳곳에  발자취가 어려있다.

 

 단순히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로망의 도시를 여행해서 일까? 나는 이곳들에 단번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토록 오래가는 잔향을 남길 수 있었다고 본다. 이동하는 것 자체가 여행의 일부가 된 것이다. 목적지로 가는 내내 핸드폰만 보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거나, 손가락 몇 번 휘두르면 금세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우버를 이용했더라면 이동 중의 풍경과 도착 후의 감상은 끊긴 채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두 발로 연결된 나의 뉴욕은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으로 뉴욕은 성실한 여행자에게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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