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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규리 Apr 20. 2022

엄마

관계의 전복


 서른여섯. 내가 처음으로 인식했던 엄마의 나이다. 그때의 엄마를 따라잡으려면 이제는 5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당시 고작 여덟 살인 나에게 엄마는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였다. 역사, 영어, 정치까지 엄마는 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국적인 레스토랑에서 생소한 요리를 먹을 때에도 엄마는 내게 주문하는 법과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스무 살 남짓 즈음까지 그렇게 배웠던 것 같다. 이후 거의 모든 외식을 가족과 함께 했던 학생 때와 달리 더 큰 용돈을 받는 대학생이 되고 월급을 버는 직장인이 되면서, 그러니까 가족과 함께하지 않는 경험이 더 많이 생기면서, 가족 외식의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한 집에 살면서도 아빠는 일과 약속으로, 딸 둘은 친구들과 만나기 바빴고, 기껏해야 배달 음식으로 바깥세상을 때우던 엄마는 그렇게 외식과 점점 멀어졌다.


  뒷좌석에 앉아 백미러로 눈을 맞추며 당신들이 새로 찾아낸 음식점을 설명듣던 시절이 지나버렸다. 이제는 내가 유명하고 좋은 곳을 찾아 모시고 간다. 주문부터 결제까지 내가 하는 나이가  것이다.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생소한 식재료나 먹는 방법을 알려주곤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가끔 뒷좌석이 그립기도 하지만 그리움보단 보람이  크다.


 엄마는 세상 모든 잡다한 것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잘 알았다. 나를 제일 잘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를 떠올리면 언제나 생각나는 일이 있다. 중학생이었던가, 워낙 덜렁거리는 성격에 지갑을 잃어버리고 당시 꽤 고가였던 지갑을 다시 샀다. 아마 용돈에 부모님 돈을 보태어 샀던 것 같은데, 일주일 만에 버스에 놓고 내린 것이다. 또 지갑을 잃어버리고 만 나 자신과 그것이 하필 비싼 것이라는 죄책감이 나를 끙끙 앓아눕게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낙담할 일이었는지 지금은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그때의 나는 일주일 동안 집에 들어와서 음식도 잘 먹지 않고 방에 들어가 나가지도 않을 정도로 속상했다. 그때 엄마는 슬며시 내 방문을 열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참던 눈물을 터뜨리며 이런저런 사정에 나 자신이 화가 나기도, 속상하기도 하다며 고백했다. 그때 엄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럴 수도 있다며 내 등을 토닥여주셨다. 그리고는 다시 웃으며 함께 덜 비싼 지갑을 다시 사러 갔더랬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의 이런 널따란 이해심도 스무 살 남짓에 머물러있다고 느낀다. 나이가 들면서, 여자였을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언제든지 나는 엄마를 이해해야 했다. 아니, 솔직히 이해가 됐다. 당당했을 젊은 우리 엄마, 그 기세가 꺾이기까지 다사다난했던 일들, 시집살이와 육아 스트레스, 장녀로서의 부담감 등 엄마가 말하는 대부분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녀의 고통을 감히 전부 헤아릴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난 그래서 나름의 노력을 했다. 어쩌면 내가 엄마의 보상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될 수 있으면 엄마와 식사 한 끼라도 하려고 했고, 약속이 많을 때는 엄마의 커피에 곁들일 디저트를 항상 포장해갔다. 엄마의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적엔 상담을 받아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같이 가곤 했다. 처음 큰돈을 벌었을 때부터는 민화 그리기, 한식 수업, 영어 강의 등 생활을 벗어난 엄마만의 취미를 꾸준히 지원했다. 쌓이는 연차에 여유가 생겨 엄마에게 비싼 생일 선물을 안겨줄 때에도, 나는 정성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과 편지를 다시 선물하기도 했었다. 끝내 엄마는 그 책에 단 한 글자도 채우지 않았지만. 엄마가 여태 내게 준 마음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 돌이켜보면 나 자신이 대견하다고 할 만한 일들을 꽤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를 이해해 주는 엄마를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언젠가부터 내가 힘들어하고, 방문을 굳게 닫아도 엄마는 내게 마음을 물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로 힘들어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나 스스로 풀리길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성인이 된 나를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방관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만약 엄마에게 감정이 상하는 일이라도 있어 털어놓기라도 하면 엄마는 성가시다는 듯 말을 말자며 손을 휘이 젓기도 했고,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무조건적인 이해를 요구하기도 했다. 꽉 찬 쓰레기봉투처럼 넘치는 섭섭함을 꾹꾹 눌러 밟았다가 꺼내어 놓아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반대의 상황이라면 나는 엄마에게 무관심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언제든 나를 수용해주던 엄마와 나의 관계가 언제부터 전복된 것일까.


 어린 시절 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컸다. 부모님의 사랑도 듬뿍 받고 자랐고, 그중에서도 엄마와 나의 사이는 더 특별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얼마 전 엄마와 꽤 큰 충돌이 있었고, 두 달이 넘도록 한마디도 않고 지내고 있다.


 한 번도 말썽 피운 적 없는 서른한 살의 내가 그 어린 사춘기 시절에도 한 적 없던 가출을 했는데, 외할머니와 아빠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내 마음엔 단단한 걸쇠가 걸렸다. 엄마는 늘 내게 무엇이든 잘할 아이, 어디서든 굶지는 않을 아이라며 믿음인지 방관인지 모를 말을 하곤 했는데, 연락 없는 것도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겠거니 생각한다.


 정말 신기한 것은 31년 간의 관계가 단 두 달만에 이렇게 차갑게 식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집은 숙소로 전락했고, 엄마와 티브이를 보며 깔깔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어색해졌다. 가족 중 내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 아니 세상에서 내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 엄마이기에 한동안은 엄마가 미울 것 같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 관계의 전복이 아직은 힘들다. 다정하고 맑고 단정했던 어릴 적이 그립다. 살수록 가족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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