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미 Jan 29. 2024

시간에 대한 생각

작년에 지원했던 교육에 선발되어 미국에 왔다. 교육기관이 있는 곳은 작은 소도시라 그 큰 로스엔젤레스 공항에서 환승해서 오느라 진이 다 빠지긴 했지만, 주말에 도착한 덕에 하루를 쉴 수 있어서 좋았다.

오랜만에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생겨서 좋다.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동네에서. 나는 타고나기를 내성적인 사람이지만 사람에 대한 흥미가 많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과 잘 지내기를 원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삶을 동경해 왔지만, 나름 그것에 가까워져 보니까 그것도 힘들단 걸 알겠다. 안 맞는 옷까지는 아닌데... 나한텐 좀 큰 옷이라 맞게 줄였으면 하는 느낌? 최근엔 계속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스스로 체감할 정도로 내 인생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건 아쉬웠기 때문에. 이런 시간이 소중하다. 이제 만으로도 서른 살에 접어드는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도 다시 해 보고.


십 대의 나와 이십 대의 나는 아예 체질이 달라졌다 할 정도로 다른 사람인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가 느끼기에 그렇다. 십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목표지향적이고, 위험기피적이었으며 인내심은 강했지만 이해심은 부족했던 것 같다. 삼십 대의 나는 어떨까?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종종 인생에 대해 밑도 끝도 없는 권태감을 느끼곤 했었다. 지금은 겨우 쫓아버린 상태인데, 시간이 갈수록 많은 것들이 지루해지는 게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오랫동안 안 한 만큼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지만, 의외로 말하는 두려움이 예전보다 덜해진 것 같아서 놀랐다. 작년에 전화영어를 나름 꾸준히 한 덕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세월의 힘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던 해, 25살의 나에게 우리 과 총괄님이 해주신 말이 생각난다. 당신 아내도 아주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라, 나이가 들면 사무관님 같은 성격이 딱 적당히 말수가 있어질 거라고, 그리고 그런 모습이 (남편 입장에서 보기에) 굉장히 귀엽다면서. 내 말수없음에 대해 그렇게 구체적으로 괜찮다고 말해 주신 분은 처음이었다. 내가 본 우리 부처의 첫인상 중 하나였고, 이런 분이 일하는 곳이라면 여기가 꽤 괜찮은 직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분. 그 분 역시 교육 중이신데, 잘 지내고 계시죠?


작년에 교육 선발되고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었다. 너무나 비극적인 스토리인데 담담한 필치 탓인지 꽤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난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미국 버전 같다고 느꼈다). 스타인벡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스타인벡의 단편소설, 캐너리 로에서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캐너리 로 동상이 있어서 반가웠다. 사고뭉치인 캐너리 로 형제들과,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Doc.

내일부터는 수업 시작이다. 눈 깜짝할 새 금방 가겠지만, 이런 기회를 받은 것에 감사하고 하루하루 온전히 보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방촌에서 찾은 행복의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