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tros Jan 01. 2024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속 의학

한센병과 싸운 불굴의 영혼

2024년 새해를 맞이하여 글 하나를 올려볼까 합니다.
제 브런치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다가오는 새해에는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킹덤 오브 헤븐] 속 의학
한센병과 싸운 불굴의 영혼


[킹덤 오브 헤븐]은 2005년도에 개봉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로, ‘역사’를 좋아하는 저는 개봉 소식을 듣고 꼭 보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해에는 병원 업무로 너무 바빠서 극장에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몇 년 후 TV에서 방영할 때 시청할 수 있었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의 국내 개봉 포스터. '반지의 제왕 시리즈' 속 엘프 레골라스로 유명해진 배우 올랜드 블룸이 주인공이라서 당시 많은 화제를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기에 영화의 줄거리를 굳이 자세히 기술하는 것은 의미 없을 것 같으나, 영화를 본 적 없는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만 정리해보자면, 중세 시대 1차 십자군 전쟁(1096년~1099년)을 통해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이슬람 세력권 내의 기독교 왕국이죠-적지 한 가운데 세워진 불안정한 왕국)을 지키고자 하는 십자군 세력과 성지를 탈환하려는 이슬람 세력 간의 대결, 그리고 그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서사물입니다.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성전이라는 명분과 다르게 결국에는 인간들의 욕망이 가장 큰 동력이 되었던 싸움이었죠) 당시의 역사를 알고 보면 더욱 재밌을 수 있지만, 그런 배경 지식이 없이 보더라도 화려하고 장엄한 화면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극장 상영분에 디렉터스컷 50여분이 추가된 ‘감독판’을 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저의 경우엔 워낙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좋아해서 인지 극장판도 지루하지 않게 봤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묘사한 그림.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명목으로 중동 지역으로 파병한 기독교 세력과 기존에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 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제목 및 시간-공간적 배경 모두 매우 ‘종교적’이긴 하지만, 보다 보면 종교적인 가치(기독교와 이슬람 두 종교의 성지 문제와 같은)에 대한 영화라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제목과 달리 ‘천국’ 같은 광경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독하게 지옥 같은 전쟁터의 모습만 계속 볼 수 있죠(천년 가까이 지난 현대에도 그 지역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영화 속의 처절한 전쟁과 전투의 끝은 결국 또 새로운 참상이라 할 수 있는, 제3차 십자군 전쟁(1189년~1192년)으로 이어진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묘하게 침울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작들 중 하나인 ‘블레이드 러너’에 중세 시대 배경을 끼얹어서 만든 영화 같다는 인상도 받았었습니다. ‘지고의 가치’를 얻기 위해 투쟁할수록, 그 가치로부터 자꾸 멀어지게 되고 오히려 싸움을 멈출 용기를 냈을 때 그 가치의 편린이나마 얻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두 영화의 결말이 서로 굉장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차와 2차 십자군 전쟁 사이의 중동 정세(출처-위키피디아). 붉은 원 안의 예루살렘 왕국을 포함하여 푸른 점선 내의 국가들이 1차 십자군 전쟁 이후 세워진 기독교 국가들.



십자군 전쟁에 대해 다룬 영화 답게, 작품 속에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이 작품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인물들이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재현된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본 후에 실제 역사를 찾아보면, 한 캐릭터만은 오히려 역사적 사실이 영화 속의 모습보다 더 빛나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예루살렘 왕국의 왕인 보두앵 4세입니다(프랑스어: Baudouin IV, 1161년 - 1185년 3월 16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보두앵 4세의 모습.



실제로 영화 러닝 타임 중 보두앵 4세가 등장하는 분량은 다 합쳐도 5분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짧습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그 어떤 인물보다 강렬하며, 저에게는 이 영화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욕망과 다툼으로 가득 찬, 위태로운 예루살렘의 상황 속에서도 보두앵 4세는 홀로 위엄과 지혜로 빛나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인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특히, 기독교 진영과 대척점에 있으나, 또 다른 명군인 살라딘(살라흐 앗 딘 유수프, 1137?~1193년)과 보두앵  4세 간의 대화 장면은, 그 어떤 전투 장면보다 더 장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보두앵 4세는 ‘예루살렘 왕국’과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동시에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한센병(Hansen's disease)으로 망가져 점차 혼자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져 가는 보두앵 4세처럼, 예루살렘 왕국 역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그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전쟁으로 도시의 겉모습이 만신창이가 되어갈지 언정 성도로서의 예루살렘의 가치가 변하지 않듯이, 보두앵 4세의 정신은 그가 숨을 다하는 순간까지도 올곧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 보두앵 4세의 사망 후의 모습.


보두앵 4세를 좀먹어가던 질환인 한센병은 나균(나종균, Mycobacterium leprae)이라는 박테리아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 감염성 질환(Chronic infectious disease)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과거에 나병, 혹은 문둥병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중에 문둥병이라는 용어는 ‘피부가 문드러지다’라는 표현에서 나온 만큼,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차별과 거리낌이 들어있어 현재는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소록도에 격리되어 살아야했던 한센병 환자와 그들을 간호했던 외국인 간호사들(마리안느와 마가렛).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은 사회적으로 격리당하고, 단종과 낙태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 사진 출처: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97


한센병은 상기도 감염의 방식(기침이나 재채기 등을 통해)으로 주로 전염되며, 상대적으로 질병의 심각도가 높지 않은 결핵형(Tuberculoid)과, 광범위한 피부 병변이 발생하고 신장이나 남성 생식기관 등에도 이상이 발생하는 나병형(Lepromatous)이 있습니다. 보두앵 4세는 전신에 병변이 있고 젊은 나이에 사망에 이르렀으며, 자식도 두지 못한 점 등을 보아 나병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는 한센병에 대한 치료 방법도 없었고, 병에 의해 발생하는 피부 병변에 의해 환자들의 외모 변형도 심하여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던 질환이기도 했습니다. 외모는 변형되지만 오히려 인지기능을 정상이기에 환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은 더 클 수 밖에 없었고, 한 때는 하늘에서 내린 형벌이란 의미로 ‘천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나균 감염으로 인해 발생한 피부 발진(출처-위키피디아).


사회적으로 배척 당하던 한센병 환자들의 모습은 사극 드라마에서도 종종 등장하며, 1999년 방영된 드라마 [허준]에서도 ‘나환자촌’이 나옵니다. 일본 애니매이션인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에도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들을 존중해주는 지도자인 에보시가 주인공 커플 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2013년에 만들어진 [구암 허준] 드라마에도 나환자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한센병에 대한 관념은 서양 역사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균인 마이코박테리아 계통의 DNA(정확히는 Mycobacterium Tuberculosis)는 17,000년 전에 영구 동토에 묻혔던 들소의 뼈에서도 발견된 바가 있고(1), 한센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환자들의 모습은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기록 상에서도 나타납니다(2). 그리고 중세 시대에 한센병이 유럽으로 퍼지면서 그에 의한 비극이 절정에 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세 시대 그림 속 한센병 환자들. 한센병 환자들의 피부 병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환자들끼리 모여 사는 모습, 성인에 의한 치료  모습 등이 묘사되기도 합니다.


기독교 중심의 사회였던 중세에는, 한센병 환자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병에 걸렸다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미 현세에서 연옥의 고통을 견디고 있기에 환자들이 사망하면 바로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도 했습니다.

1873년에 노르웨이의 의학자인 게르하르 아르메우에르 한센(Gerhard armauer Hansen – 한센병은 이 분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습니다)이 원인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유전병으로 여겨져, 환자와 가족들에게 더욱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한센병의 원인균을 밝혀낸 의학자 '한센'의 사진.



한센병을 뜻하는 영단어인 ‘Leprosy’는 "비늘이 있는(Scaly)"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낱말 ‘레프로스(lepros)’에서 기원하였으며(3), 이 병명 역시 ‘피부’에 관련된 것이어서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외모 변형’에 대한 면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보두앵 4세는 9세에 발병하여 24세에 사망할 때까지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고통(왕이라서 대놓고 배척 당하진 않았으나, 한센병을 앓고 있는 상황은 왕이라는 직위를 유지하는데 여러모로 불리했을 것입니다)을 견뎌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련을 견뎌내고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욱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냈기에, 역사와 영화 속 모두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감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 영화 말미에 보두앵 4세의 조카가 한센병이 발병한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하며(피부 병변에 감각이 저하되는), 보두앵 4세의 누이인 시빌라 공주는 자신의 아들이 미래에 받게 될 고통을 알기에 일종의 안락사를 시도하게 되는 비극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시빌라 공주의 아들은, 한센병 환자였던 보두앵 4세와 오래 가까이 지낸(혹은 그가 아닌 다른 환자들이 주위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면역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어린 아이였기에 감염되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각주), 이 질병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전병’처럼 오해할 수 있는 장면이며, 19세기 이전의 상식으로는 유전병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물론 현대에는 항생제 치료를 통해 완치가 가능하며, 유전병이 아니라는 것도 밝혀져 있기에 ‘한센병’ 환자와 가족들은 이전처럼 배척 받으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보두앵 4세가 현대 의학의 힘으로 한센병에서 완치될 수 있었다면, 예루살렘 왕국의 운명과 십자군 전쟁의 향방은 어떻게 되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참고문헌 및 각주>
1.    Rothschild BM, Martin LD, Lev G, et al. Mycobacterium tuberculosis complex DNA from an extinct bison dated 17,000 years before the present. Clin Infect Dis 2001; 33: 305–311.
2.    Carolyn O’Brien and Richard Malik. History and mysteries of leprosy. Journal of Feline Medicine and Surgery (2017) 19, 496–497
3.    Ronnie Henry. Etymologia: Leprosy. Emerg Infect Dis. 2015 Dec; 21(12): 2134.

*** 각주: 한센병의 전염력은 매우 낮은 편이며, 보통은 발병한지 얼마 되지 않은 환자와 접촉할 때 감염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보두앵 4세의 조카인 보두앵 5세는 열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긴 했으나, 정확한 사인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글 옵션          




최고예요 좋아요15

댓글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