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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06. 2024

갑자기 말을 잃어버리게 된 위나라의 재상 종요

-산초의 독성? 아니면 또 다른 원인이?

이번에도 정미현 작가님과 함께 삼국지 관련 의학 이야기를 다뤄보았습니다.

연휴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말을 잃어버리게 된 위나라의 재상 종요

-산초의 독성? 아니면 또 다른 원인이?



모종강은 “천하대세는 나누어짐이 오래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침이 오래되면 반드시 나누어진다.”는 문장으로 [연의]의 판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작에 걸맞게, <연의>는 솔밭처럼 나뉘어졌던 천하가 서로 창칼을 맞대고 힘을 겨루다 마침내 다시 하나로 통일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러니 서사의 중심은 자연스레 전투와 전쟁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간단히 요약하자면, 후한 말의 영웅들이 땅따먹기 하는 이야기지요.


반대로, 전투 외적인 부분은 잘 다뤄지지 않습니다. 손권 말년의 가장 큰 사건, ‘이궁의 변’마저 생략되었을 정도입니다. 나름 주역으로 여겨지는 제갈량 역시 ‘이릉대전’ 후 거의 망할 뻔했던 촉의 국력을 끌어 올린 공은 대폭 축소되고, 전투 중 천재 책략가로서의 모습만 강조됩니다.


그 외의 분야에서는 아무리 활약해도 대접이 박했습니다. 종요(鍾繇, 151년 ~ 230년)도 그렇게 [연의]의 대표적인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공은 대폭 축소된 채, 마초에게 장안성을 빼앗기는 정도로만 나오죠.


하지만 실제의 종요는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말솜씨가 뛰어났는지 설득의 귀재가 아니었나 싶은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그림> 종요의 초상(위키피디아 검색), 1607년경 작품.



이각, 곽사(동탁 휘하 출신의 군벌)의 통치 당시 종요는 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주(兗州-후한 13주 중의 하나로 현재의 산둥성 서남부와 허난성 동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던 조조는 황제에게 표를 올려 연주목의 자리를 인정받고자 했는데요, 이각과 곽사는 조조의 사자를 억류하며 이를 거절합니다.


이때 종요가 이각과 곽사를 설득해 조조를 연주목에 임명하게 합니다. 조조는 그 덕에 연주에 대한 권리를 합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헌제(후한의 마지막 황제)가 이각과 곽사의 손아귀에서 탈출합니다. 종요의 계략이 주요했다고도 합니다. 종요는 이 공으로 사태가 일단락된 후 열후에 봉해집니다.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갈 곳을 잃은 헌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조조가 주워 옵니다(황제줍). 그렇게 협천자(협천자挾天子 령제후令諸侯 –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다)에 성공했음에도, 조조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쟁쟁한 적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양주의 군벌 마등과 한수가 서로 싸우게 되는데요, 조조는 원래는 의형제였던 둘이 싸우다 말고 갑자기 중원으로 들이닥칠까 염려합니다. 이에 종요에게 ‘법률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도 되니까 관중의 군벌을 관리하라’고 해요.

<그림> 마등(좌)과 한수(우). [연의]에서는 충의지사로 나오지만, 마등과 한수는 사실 동탁 세력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각과 싸운 이유도 이각에게 군량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화가 나서였고요.



종요는 이 파격적인 권한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등과 한수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냅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등과 한수는 종요에게 설득됩니다. 근거지로 귀환했을 뿐 아니라 아들을 중앙으로 보내 벼슬을 하도록 했거든요. 말이 벼슬이지, 실제로는 자발적인 인질이었지요.


관도대전 후, 원상이 원소의 뒤를 이었습니다. 원상의 부하 곽원이 원소의 조카 고간, 흉노의 선우 호주천과 손을 잡아 하동 일대를 침략했습니다. 상당한 위협이 되었는지, 대다수의 관리가 하동을 버리고 떠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종요는 사람들을 설득해 남아 싸우게 만듭니다.


당시 마등은 당시 원상과 화친을 맺고 있었는데요, 종요는 장기를 보내 마등을 설득, 회유하는 데 성공합니다. 마등은 원상을 배신, 아들 마초를 시켜 곽원군을 공격했고요, 곽원은 마초의 부장 방덕과 싸우다 죽습니다. 훗날 관우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그 방덕 맞습니다.


<그림> 청나라 시기에 발간된 [연의]에 실린 마초의 그림. 마등의 장남인 마초는 훗날 촉한으로 망명하여 표기장군(대장군 다음가는 무관직)에 이릅니다.



전투가 끝난 후, 방덕이 곽원의 수급을 베어 보여주자 종요가 통곡을 시작합니다. 곽원은 사실 종요의 조카였기 때문이죠. 방덕은 졸지에 종요에게 사과합니다. 종요는 이에 “곽원은 내 조카지만 국가의 적이니, 경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답합니다.


그러면 왜 말해서 방덕만 무안하게 만들었나 싶지만, 어쨌든 그만큼 공과 사를 잘 구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요는 그후 백성을 설득해 쑥대밭이 되었던 낙양 일대로 이주시키고, 도시를 재건합니다.



<정사> 위나라가 처음 건국했을 때 종요는 대리로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상국이 되었다. 위문제 조비가 태자였을 때 종요에게 오숙부라는 가마솥을 하사했다. 그 솥에는 이러한 글귀를 새겼다.


“위나라를 밝히고, 한의 울타리가 된다네. 재상으로서 종요를 생각하면 심장을 지키는 등뼈와 같다. 밤낮으로 최선을 다해 일을 하니, 편안히 쉴 곳도 없구나. 모든 관리들의 스승이 되었으니, 본보기로 삼을 사람은 이뿐이로구나! (…)

당시에 종요는 사도 화흠, 사공 왕랑과 함께 선대의 명신으로 각광받았다. 조회를 마친 문제는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들 삼공은 당대의 위대한 인물들이다. 후세에 또 이와 같은 인물들이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종요전]



뛰어난 설득력과 내정 능력이 합쳐지니, 명재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조비가 종요를 “모든 관리의 스승이자 본보기”라 치하했을 정도입니다. 종요와 화흠, 왕랑 세 명으로 이루어진 재상 라인업에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죠. 이런 라인업은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요.


<그림> 조위 3대 재상의 모습. 어디까지나 이미지컷입니다.



종요의 위업은 그뿐 아닙니다. 특히 서예사에서는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정자체로 알려진 해서체를 확립했거든요(소해(小楷: 작고 깔끔하게 쓰는 해서체)의 창안자). 서예가의 성인, 왕희지가 존경하던 사람입니다.


杜稿鍾隸 漆書壁經(두고종예 칠서벽경)


한문 습자교본, 천자문의 한 구절입니다. “두조의 초서와 종요의 예서가 있고, 옻칠로 쓴 벽 속의 경전이 있다”는 뜻입니다. 서예에서 종요의 위치를 짐작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그림> 법첩에 올라 전해져 오는 종요의 글씨인 '선시표(宣示表)'



이렇게 다재다능하고 완벽했던 종요가 말년에 큰 사고를 칩니다. 첩 장창포(張昌蒲-창포는 ‘자’로, 이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에게 빠져 정실, 혹은 정실 역할을 하던 손 씨와 이혼한 것입니다. 심지어 장창포는 종요보다 무려 48세나 어렸어요. 네, 48세가 아닙니다. 48세가 어렸습니다.


이유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손 씨는 장창포가 임신했을 때, 이를 시기해 독약을 먹이려 들었거든요. 장창포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토해냈지만, 그 후로도 며칠 정도 어지럽고 눈앞이 깜깜했답니다(이것은 과연 무슨 약이었을 지 의사로서 궁금하긴 합니다).


누군가 왜 종요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묻자, 장창포는 “남편이 나를 믿는다 한들 누가 증인이 되어주겠습니까? 하지만 부인은 제가 남편에게 고하리라 예상하고 있을 터, 그 전에 먼저 설명하려 들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발각된다면 유쾌하지 않겠습니까?”라 답했습니다. 보통 여자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장창포의 예상대로 손 씨는 종요에게 “아들을 낳는 약을 줬는데, 도리어 독이 되었습니다.”라며 스스로를 변명합니다.


종요는 “그렇게 좋은 약을 몰래 넣을 리 없다.”며 사건에 대해 취조해 사실을 밝혀냅니다. 손 씨는 이 때문에 쫓겨났고요.


물론 이런 자세한 사정을 사람들이 알 리 없죠. 세간에서 보기에는 그저 70대 고위 관리가 48세 연하의 첩에게 홀려 정실을 쫓아낸 모양새였습니다.


<그림> 종요는 조위의 휴 헤프너? (휴 헤프너는 유명 잡지인 [플레이보이] 창간자로 60 세 연하의 미녀와 결혼하기도 함). 실제 장창포는 굉장히 행동이 조심스럽고 지력이 뛰어난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씨춘추> “종회의 모친은 종요의 총애를 받았다. 종요가 그녀를 위해 정실부인을 내보냈다. 변 태후가 이에 대해 말했기에, 문제 조비가 조서를 내려 종요에게 부인을 다시 거두도록 했다. 종요는 극도로 분노해 짐독을 먹고 자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산초를 먹어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는 마침내 명을 거뒀다.”


당시 태후였던 무선황후(武宣皇后-조조의 계비) 변 씨가 특히 분노해, 아들 조비를 시켜 이혼을 말리려 합니다. 동생들에게만 가혹했을 뿐, 어머니에게는 효자였던 조비는 종요에게 쫓아낸 정실부인과의 재결합을 명령했습니다.


종요는 평소처럼 조비를 설득하려 하는 대신, 극도로 분노해 짐독(鴆毒)을 먹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무위로 돌아가고(수많은 왕후장상을 죽음으로 몰아간 짐독이 종요에겐 안 들었던 것도 신기…), 그 대신 산초를 많이 먹어 말을 못 하게 되었답니다. 조비도 결국 명을 거뒀지요. 결과적으로 보면 조비를 설득하기는 한 것도 같고요.


<그림> 짐독의 원료라고 전해지는 짐새(좌)와 산초나무(우상)와 말린 산초 열매(우하).



종요는 그렇게 귀하게 지켜낸 장창포와의 관계에서 아들을 얻었으니, 무려 74세(!)의 나이(각주 1)였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삼국지 후반부의 주역 중 한 명인 종회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속에서 종요가 경험한 실어증의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서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몇 가지 가능성 있는 진단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산초(山椒) 열매 다량 섭취 후 발생한 국소지각 마비(혀와 입 안에)의 발생과 이로 인한 발음 장애를 실어증으로 오인?


산초 열매는 예전부터 산초 기름을 만드는 원료로 쓰고 식용 또는 약용으로 활용해왔다고 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진초(秦椒, 분지)라고 하며, 그 유래와 효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나라 땅에서 나기 때문에 진초라고 한다. 사천성에서 나는 것을 촉초(蜀椒), 천초(川椒)라 하고-초피나무를 의미함-, 관중, 협서에서 나는 것을 진초(秦椒)라고 한다. 효능은 따뜻하며(溫) 맛은 맵고(辛), 독이 있다. 문둥병으로 감각이 아주 없는 것을 낫게 하며 이빨을 든든하게 하고 머리털을 빠지지 않게 한다. 눈을 밝게 하고 냉으로 오는 복통과 이질을 낫게 한다”


동의보감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종의 살균(향균?) 작용이 있어 보이며, 감각 신경에 영향을 주고, 소화기관의 운동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산초나무는 영어로 ‘치통나무(Toothache tree)’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산초 열매껍질을 씹으면 산시올(sanshol, C16H27ON)이라는 성분에 의해 치통을 완화하는 작용(각주 2)이 있다고 합니다. 산초에 의한 국소마취 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죠.


종요가 짐독 섭취로 인한 자살 시도 실패 후에 산초를 먹기로 결심한 이유를 정확히 추측하긴 어렵지만, 산초가 어느 정도 독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당시 종요의 집에 향신료 겸 마련해 놓은 산초 열매가 많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종요는 산초 열매를 잔뜩 집어먹고 이로 인해 사망에 이르진 않았으나 입 주위와 구강 내(혀, 구강 내 점막, 잇몸 등)에 국소마취 작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치과 치료 등으로 구강 내 국소마취를 해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입안의 감각이 떨어지면 발음도 굉장히 어눌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산초의 부작용으로 종요도 말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고, 말을 하기 힘들어진 김에 그냥 말을 못하는 상태라고 외부에 알리고 두문불출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림> 종요의 심리? 이말년 작가님의 그림을 한 컷 사용하였습니다.




(2)  산초는 별 효과 없었는데, 고령의 나이(+기저질환)와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브로카 영역(Broca area)에 뇌경색이 발생하여 ‘운동성 언어마비(motor aphasia)’를 보였을 가능성

<그림> 브로카 영역(Broca’s area: 파란색과 노란색 부분을 합친 영역), 전두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곳에 손상이 발생하면 운동성 실어증(Motor aphasia – 운동 영역 손상에 의한 실어증으로, 감각영역은 정상이므로 타인의 말은 이해하지만 자신의 뜻을 표현하지는 못함)



실어증 사건이 발생했을 당이 종요가 70대로 이미 매우 고령이었으며, 고대의 시대적 한계로 인해 고혈압이나 당뇨 등의 기저질환이 있었다 해도 진단도, 치료도 하지 못하고 지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종요에게 갑자기 뇌경색이 발생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뇌경색으로 인해 다양한 증상이 발생할 수 있지만, 종요처럼 ‘말을 못하는’ 증상이 일어나는 것은 운동성 실어증의 증상으로, 이는 뇌에서 브로카 영역에 손상이 발생할 경우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래 그림과 같이 실어증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고대의 의학 수준을 고려할 때,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이 주증상인 유창성 실어증 양상이 보였다면 ‘말을 못하게 되었다’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종요가 ‘노망이 났다’거나 ‘미쳐버렸다’와 같은 기술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뇌경색 증상인 팔-다리 마비와 같은 증상이 동반되었다면, 사서에 ‘중풍’ 혹은 ‘수족마비’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수도 있고요.


<그림> 증상에 따른 실어증의 종류



뇌경색에 의한 운동성 실어증도 재활을 꾸준히 하면 서서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사서 속의 종요는 실어증을 앓았다가 이후에 완벽히 회복된 것처럼 묘사되는데, 처음 뇌손상의 범위가 비교적 크지 않았고 본인과 가족이 언어 능력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해서 좋아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말을 못하게 됨 – 심인성 실어증


말을 할 수 없는 원인에는 앞서 언급한 뇌손상에 의한 실어증도 있지만, 커다란 심리적 충격에 의해 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정신과적으로 진단명을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라고 붙일 수 있으며, 전환장애의 증상으로 실어증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환장애란 ‘정신적인 에너지가 신체증상으로 변환되었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진단명이며, 심리적인 스트레스(갈등욕구)로 인해 다양한 신체 증상(운동, 감각 증상 등)이 나타나지만 정밀 검사를 하여도 해부 생리학적인 기전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에 이 진단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히스테리신경증(Hysterie)으로 불리기도 했던 질환입니다. 사춘기나 성인 초기의 나이대와 여성에서 더 잘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종요와 같은 고령의 남성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황제와 태후가 자신의 집안에서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참견을 한다는 사실과, 본인이 아끼는 장창포와 태아의 안위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상황이 커다란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여 종요에게 실어증을 주증상으로 하는 전환장애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이후 결국 황제가 종요의 재혼을 허락하고 가족들의 심리적 지지(여보, 아빠 힘내세요!)가 지속되자 전환장애에서 회복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4)  혹은 꾀병? 말재주가 뛰어났기에 말을 잃은 것으로 조비와 태후에게 시위를 했던 것일지도…


얼핏 생각하면 전환 장애와 비슷해 보이지만, 꾀병은 전환장애와는 다른 것입니다. 전환장애가 심리적 스트레스로 인해 육체적인 증상이 나타나는 정신과적 질환이라면, 꾀병(Malingering)은 환자가 ‘2차 이득(secondary gain)’을 얻기 위해 증상을 꾸며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보험금을 타기 위해 혹은 처벌 등을 피하기 위해 병에 걸린 척하는 사람들이 이에 속하게 됩니다.


종요의 경우에는 손씨와의 이혼 및 장창포(와 태아)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기에, 실어증 증상 역시 꾀병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다 이루고 나서는 ‘말을 못하는 증상’이 모두 회복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황제에 대한 시위를 겸하여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꾸며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실어증을 꾀병의 증상으로 택한 이유도, 꾸며내기 쉬움+자신의 특기인 말을 잃는 것이 황제에게 가장 큰 심리적 압박을 주는 행위(종요한테 일을 시켜야 하는데 말을 못하다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실어증이 오래 가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조비 사후, 조예가 황제였을 때도 재상으로 남았으니까요. 만약 말을 못 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면 재상 노릇을 계속했을 리 없습니다.


오히려 실어증보다는 관절염 문제를 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대전에 오를 때 호분의 부축을 받았답니다.


<정사> 위명제 조예가 즉위하자 정릉후로 봉해졌으며, 식읍 5백 호가 더해져서 전에 받은 것과 합쳐 모두 1,800호가 되었고, 태부로 승진했다. 종요는 무릎에 관절염을 앓았기 때문에, 황제를 배알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불편했다. 당시에 화흠도 나이가 많아 여러 가지의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조회를 하러 올 때마다 가마나 수레를 이용했으며, 대전에 오를 때는 호분이 부축해야 했다. [종요전]



종요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무릎 관절에 퇴행성 골관절염이 발생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라면 무릎에 인공관절치환술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보존적으로 약물 사용이나 주사 치료도 있구요), 시대의 한계 상 무릎의 관절 통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행을 줄이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건강(언어능력)을 회복한 종요는 조예에게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머리카락을 깎는 곤형(髠刑-각주 3)이나, 발뒤꿈치를 절단하는 월형(刖刑) 등 신체를 손상시키는 육형(肉刑)으로 사형을 대신하자 주장하죠.


사형제 폐지는 조조 때부터 밀어왔던 종요의 숙원 사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권운동가 같지만, 그보다는 난세로 인한 인구 감소를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발이 잘려도 아이는 낳을 수 있으니, 사형보다는 월형을 하자 주장했거든요.



<정사> 태화(太和) 년간에 종요는 이러한 상소를 올렸다.

“(…) 범법행위를 자주 저지르는 자로서 나이가 20세에서 45세 사이에 있는 경우는 발이 잘리더라도 자식을 낳아서 기를 수는 있습니다. 지금 천하의 인구는 효문제시대보다 적습니다. 계산을 해 보면 1년에 3천명이 이러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장창은 육형을 없애자 일년에 약 1만 명이 죽었습니다. 신이 바라는 대로 육형을 다시 부활시키면 년간 3천명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종요전]



조조는 종요의 말에 설득되기는 했지만,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결정을 보류합니다. 조비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조예 역시 종요의 말에 어느 정도 설득될 뻔합니다. 하지만 혼자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었으므로, 삼공과 구경에게 사형제 존속 혹은 폐지를 주제로 토론하라는 명을 내리죠. 공경을 상대로는 종요의 설득력이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도 왕랑이 위하력을 근거로 반대했고, 공경 역시 왕랑에게 동의했거든요.


숙원을 푸는 데는 실패했지만, 왕성하게 정치 활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요는 무려 79세의 나이에 사망합니다. 실어증 사건이 일어난 지는 수 해가 흐른 후였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였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워낙 늦게 얻은 탓에, 종회는 6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셈이 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종요의 정력은 백성 사이에서도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기괴한 이야기 모음집인 [육씨이림]과 [세설신어]에는 종요가 어느 아름다운 귀부인의 혼령과 귀접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70대에 아들을 보다니, 지금도 흔한 일이 아닌데, 당시에는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각주>

1. 세계 신기록으로는 94세에 첫 아이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인도인 Ramjit Raghav(1916 – 11 February 2020)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남성은 94에서 첫 아이, 96세에 둘째를 얻었다고 하여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아버지(world's oldest father)’로 유명해지고 매스컴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04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부인도 범상치는 않은 분인데, 첫 아이를 낳았을 때의 나이가 49세였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종요 커플과도 비슷합니다.


기네스 기록 상에는 오스트렐리아 사람인 Les Colley (1898-1998)가 92세에 아버지가 된 것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9번째 아이).


실제 남성의 생식능력도 35세를 넘어가면 감소하기 시작해, 35세 미만 남성의 생식률(fertility rate)은 52%인데 반하여, 35세 이상에서는 25%라는 통계도 나온 바가 있습니다(Mathieu C, Ecochard R, Bied V, et al. Cumulative conception rate following intrauterine artificial insemination with husband’s spermatozoa: influence of husband’s age. Hum Reprod. 1995;10:1090–1097.).


2. [산초유, 국부마취-진통-향균효과], 출처-의학신문. http://www.bo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56


3.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 고대 중국에서 큰 형벌이 되는 이유는, 춘추전국시대에 쓰여진 효경(孝經)에 나오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구절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머리카락 조차도 함부로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인 것이죠. 이와 관련하여, 삼국지연의 속 조조는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의 목숨을 대신한다’는 뜻의 [이발대수(以髮代首)]라는 일화를 보여준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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