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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Feb 23. 2023

영화 ‘헤어질 결심’ 속의 의학

불면증에 시달리는 남자와 물의 요정 같은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


***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 이전 글인 [그대여, 나를 버리고서 편히 잠들지 못할지어다.]를 같이 보셔도 좋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박찬욱 감독의 최신작인 [헤어질 결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영화답게 예술성이 지나치게 높아서 재미가 없거나 지루하지는 않을까?’란 저의 편견과 불안이 잠재워지는,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2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서 놀랍기도 했고요.
앞으로도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주저함 없이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영화를 보겠다는 ‘결심’이 생긴…).

지난 번에는 [올드보이]에 대한 글을 썼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나온 의학적인 소재에 눈이 갔다는 점이 스스로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 취향에 잘 맞는 영화 속에 제 전공 분야가 들어있으니 더 재밌었던 것일까요?

어쨌든 영화의 줄거리 자체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편이므로, 저는 ‘의학’에 관련된 내용만을 중심으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이 영화는 불면증에 시달리던 형사인 장해준과 살인 용의자인 여성 송서래 사이의 사랑을 다룬 로맨스 스릴러이지만, 의사이자 신화/전설 마니아인 제 시각에서 봤을 때는, 박찬욱 감독이 ‘운디네의 저주(Ondine's curse)’라고도 불리우는 ‘호흡 중추 자동능 장애(failure of respiration center automaticity)’라는 질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일종의 재해석 작품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n the Waves (Ondine)” (1889) by Paul Gauguin (1848–1903).



‘운디네의 저주’라는 병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우선 운디네라는 존재의 전설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운디네(Ondine)는 16세기에 활동했던 연금술사인 파라켈수스에 의해 창조된 개념으로, 물이라는 원소를 담당하는 정령입니다(1). 그리고 이 정령에게 좀 더 구체적인 사연을 덧붙인 사람은 독일의 작가인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Friedrich de la Motte Fouqué, 본명: Friedrich Heinrich Karl de la Motte, Baron Fouqué, 1777-1843)였습니다(2). 푸케가 쓴 스토리가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3).


푸케의 초상화.



푸케의 이야기 속 운디네(Undine)는, 발랄하고 순수한 물의 정령이었는데, 기사인 훌브란트와 사랑에 빠져 ‘인간의 영혼’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과 더불어 훌브란트가 바라는 최고의 여성으로 변모합니다. 그녀가 인간의 영혼을 얻는 대신 훌브란트에게도 하나의 금기가 생겨나는데, 운디네를 물가에서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운디네 안의 ‘물의 정령’으로서의 신비함을 감당하지 못한 훌브란트는 점차 그녀를 멀리하게 되고 결국엔 금기를 깨서 운디네는 그의 눈 앞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운디네가 사라진 이후 훌브란트는 다른 여자와 다시 결혼하였고, 이에 운디네는 정령으로서 그녀를 배신한 훌브란트에게 벌을 내려야했기에 그를 자신의 눈물에 빠뜨려 질식시켜 죽이게 됩니다.
정말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와 흡사한 이야기죠.


이후 프랑스의 작가 장 지로두(Jean Giraudoux, 1882–1944)는 이러한 푸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운디네(ondine, 1939)라는 연극을 만드는데, 이 연극 내에서는 운디네가 내리는 저주에 대해 좀 더 뚜렷하게 묘사가 됩니다(4).

연극 속의 운디네는 자신을 배신한 연인 한스에게 저주를 내리는데, 그 내용은 “당신이 떠난 이후로 나는 내 몸이 본래 알아서 할 수 있던 일을 억지로 하기 위해 강요해야 했습니다. 눈으로 보도록 명령하지 않으면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오감, 30개의 근육, 심지어 뼈까지… 한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듣는 것도 숨쉬는 것도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라는 대사로 표현이 됩니다. 모든 자동적으로 움직여지는 기능이 상실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죠.


이후에 다른 작품들에서도 운디네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으로 묘사되고, 현대의 소설인 ‘The Glass Room (2009)’에서는 “당신은 깨어 있는 모든 호흡으로 나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했고 나는 그 맹세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신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숨을 쉬겠지만 잠이 들면 호흡이 멈춥니다.” 등의 묘사가 나오기도 합니다(5,6).


“Undine at the Window” (1915) by Arthur Rackham (1867–1939).



이러한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운디네의 저주는 ‘잠이 들었을 때(심하면 깨어있을 때에도), 숨쉬기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전설 속 내용에서 영감을 얻은 의사들인 Severinghaus와 Mitchell에 의해, 1962년부터 이와 비슷한 증상을 지닌 환자들에게 ‘운디네의 저주 혹은 운디네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7).


운디네의 저주에 해당하는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다리뇌와 숨뇌에 위치한 호흡 중추에 이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정상이라면 이산화탄소와 산소 레벨, 혈액과 뇌척수액의 산성도(pH)에 반응하여 수면 중에도 자동으로 조절되어야 할 호흡 기능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죠.


호흡 중추(출처-위키피디아). 다리뇌 레벨(붉은 색 원 안)와 숨뇌 레벨의 호흡 중추(파란 색 타원). 호흡 중추에서 나온 신경들이 호흡근과 횡경막의 움직임을 조절




이러한 이상은 유전자 이상에 의한 선천성 중추 저호흡 증후군 (congenital central hypoventilation syndrome, CCHS) 환자에게서 나타날 수 있지만, 뇌졸중이나 종양 등으로 인해 후천적으로 신경계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에게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환자들은 잠자는 동안 호흡이 원활히 되지 않아(체내에 이산화탄소가 쌓여도 자동으로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사망에 이를 수 있으므로, 기도 삽관, 기관 절개술, 기계 환기 및 집중 모니터링 등이 필요합니다(8)
.



이와 같은 운디네의 저주와 [헤어질 결심]을 비교해보면 정말 묘하게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헤어질 결심] 포스터. 여주인공인 송서래(탕웨이, 왼쪽)와 남자주인공인 장해준(박해일, 오른쪽).



바다에서 온(정확히는 바다 건너 중국에서 온) 신비한 여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남성이 그녀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커리어와 자부심이 ‘붕괴’되고, 결국엔 그녀를 잃고 영원히 불면증에 시달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암시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헤어질 결심]의 스토리라인인데… 여러모로 운디네의 이야기, 그리고 운디네에서 영향을 받은 인어공주 이야기를 현대적,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려낸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주인공인 송서래는 운디네나 인어공주처럼, 다른 문화권에서 온 존재이고 대화를 위해 번역기를 사용해야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장해준이 사랑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달콤한 사랑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송서래와의 사랑 자체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사건 수사의 방향을 흐리는 식으로), 종종 그녀가 보이는 소시오패스스러운 행동들(타인을 안락사 시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크지 않아 보인다거나, 살인을 저지르거나 시체를 처리할 때 보여주는 묘한 냉정함), 장해준이 그녀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물가처럼 보이는 청록색 벽지가 붙은 집, 혹은 그녀가 바닷가에 있을 때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죠) 불면의 저주를 얻게 된다는 점에서 사람보다는 요정이나 정령 같아 보이는 캐릭터입니다.





어떠한 치료도 안 듣던 만성 불면증(9)에 시달리던 장해준에게, 불면증의 원인일지 모를 사건 사진들의 제거(심리적 원인) 및 자신의 호흡법(10)으로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일종의 인지행동치료)도 그녀를 신비한 존재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또한, 그녀가 사용하는 펜타닐(Fentanyl)이라는 마약성 진통제가, 2~3mg 정도의 양으로도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만들 수 있는 치명적인 약이며, 펜타닐 중독이 호흡 부전에 의한 사망(영화 속에서 잠들듯이 사망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운디네의 저주’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녀의 최후의 모습 역시 ‘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운디네 혹은 인어공주를 연상킵니다.



송서래와 더불어 또 다른 주인공인 장해준의 모습도 운디네 전설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낯선 땅에서 외로움을 느꼈을 송서래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가는 장해준은, 인간 세상이 처음 발을 디딘 ‘운디네’가 사랑에 빠졌던 동화 속 남자주인공들의 모습과 가까워 보입니다. 특별한 존재인 운디네가 훌브란트나 한스에게 사랑을 느꼈듯이, 송서래 역시 장해준이 ‘현대인 중에서도 특별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편안해하는 장해준의 모습은 요정과 사랑에 빠진 동화 속 남자 주인공과 흡사해 보이고, 송서래를 위해 수사 방향도 흐리게 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맹세의 말(깨어 있는 모든 호흡으로 당신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한다)을 내뱉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서래와 헤어진 후에는, 불면증이 매우 악화되어 여러가지 치료를 받는 모습도 나오는데, 이 때는 수면 클리닉에서 상담하고, 이런 저런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11).
수면다원검사도 받았는지(밤새 수십번도 더 깨는 것을 검사로 확인했다는 대사가 나옵니다) 그에 따라 양압기(continuous positive airway pressure, CPAP)도 사용하는 모습이 잠깐 스쳐지나가죠.

극중에서 장해준은 ‘코골이는 없지만, 입으로 숨을 너무 많이 쉰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 수면 중에 입으로 숨쉬는 것(mouth breating)은 불면증, 수면 무호흡증, 코콜이 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CPAP을 처방하여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운디네의 저주와 완벽히 같은 증상은 아니지만, 수면 중 구강 호흡 혹은 무호흡 증상이 있어 양압기를 사용해야하는 장해준은, 잠들 때마다 숨을 쉴 수 없게 된 운디네의 연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의학적인 도움에도 장해준은 불면증을 끝끝내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 어떤 치료도 그를 불면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지 못했고, 운디네처럼 신비롭고 사랑스럽던 송서래로 인해 잠시 잠들 수 있다가 다시 수면이 박탈된 그는 굉장히 피폐해져만 가죠. 그리고 ‘마침내(이 단어가 참 자주 나오는 영화입니다)’, 그녀와 영원히 헤어지게 되어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 암시됩니다.


비극적인 물의 정령 전설을 닮았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신비로운 부분은 현대 의학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해준의 불면증일지도 모릅니다. 수면 장애라는 과학적인 요소가 사랑의 신비를 극대화시키는 소재로 활용되는 것이니까요.

이런 방식의 의학적 고증 오류(?)는, 영화를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의학의 힘으로 치료될 수 없는 '저주'와도 같은 불면증이, 이 영화의 분위기에 정말 잘 어울리니까요.






<참고문헌>
1.     Paracelsus. Encyclopedia Britannica. http://www.britannica.com/eb/article?eu=59828
2.     de la Motte-fouque FH. Lawrence and Bullan; London: 1896. Undine: a tale by Friedrich Baron de la Motte-Fouque. Gosse E (trans)
3.     Andersen H.C.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59. Fairy tales. Kingsland LW (trans)
4.     Giraudoux J. Random House; New York: 1954. Ondine. Valency M (trans)
5.     Mawer S. Other Press Ed.; New York: 2009. The Glass room.
6.     Zeferino Demartini, Junior, Luana Antunes Maranha Gatto, et al. Ondine's curse: myth meets reality. Sleep Med X. 2020 Dec; 2.
7.     Severinghaus J.W., Mitchell R.A. Ondine's curse: failure of respiratory center automaticity while awake. Clin Res. 1962;10:122.
8.     Tanaka K., Kanamaru H., Morikawa A. Central hypoventilation syndrome complicated with lateral medullary infarction after endovascular treatment of the vertebral artery dissecting aneurysm: a case report. NMC Case Rep J. 2016;3(4):133–136.
9.     국제수면장애진단분류 3판(ICSD-3)에서는 불면증 대신 불면장애(insomnia disorder)라고 하며, 3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만성 불면장애라고 합니다.
10.  영화 속에서는 미해군 호흡법을 개량한 것이라고 언급되는데, 대체의학자인 Dr. Andrew Weil에 의해 개발된 4-7-8 호흡법 같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초간 숨을 들이쉬고, 이후 그 상태로 7초간 숨을 참고, 8초간 천천히 내쉬는 호흡법인데, 이를 3회 반복하면 불안을 줄이고 전반적으로 심신을 이완시켜 수면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https://edition.cnn.com/2022/09/16/health/4-7-8-breathing-technique-relaxing-wellness/index.html).
11.  오전 시간에 충분한 햇빛을 쬐며 산책할 것을 권유(낮 동안은 세로토닌, 밤에는 멜라토닌이 잘 분비되도록)하는 것이 나와서, 이 부분은 나름 고증에 맞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극중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다양한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도 시행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사는 곳이 안개가 많은 동네라 햇빛 쐬기가 어렵다고 하자 의사가 도파민 처방을 해준다고 했는데, 이건 조금 잘못 말한 부분 같기도 합니다. 도파민 효현제나 멜라토닌 처방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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