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하디, 아, 그대가 내 무덤을 파고 있는가
토마스 하디
아, 그대가 내 무덤을 파고 있는가
내 애인인가? 내 애인이 너무 슬퍼서 무덤 근처에 루(무덤 근처에 심는 나무)를 심고있나?
아니에요, 어제 그는 결혼하러 갔어요
우리마을에서 제일 부잣집 딸한테요
그 애인이 이렇게 말했죠, 뭐 어쩌겠어
내가 정절을 못 지킨다는 것이 이제 와서 그녀를 상처 입힐 것도 아니잖아?
그럼 지금 누가 내 무덤을 파는 거야?
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지금 앉아서 이런 생각하고 있어요
‘무슨 소용이야, 무덤에다 꽃을 심어봐야 어떤 이득이 생기겠어?
무덤에다 꽃을 심어봐야 걔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누군가 내 무덤을 파고 있잖아
내 적인가? 날 몰래 찔러 보는 건가?
모든 살을 가진 사람들에게 닫히는 문(죽음의 문)을 당신이 건너갔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워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디 묻혔는지도 몰라요
그럼 내 무덤을 파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말해봐, 난 도저히 누군지 모르겠어
아 저예요 주인님
당신의 작은 개예요, 여전히 이 근처에 살아요
제가 여기서 왔다갔다 하는 것 때문에 깨진 않으셨죠?
아 그랬구나, 네가 내 무덤을 팠구나
왜 그 생각이 안 났을까
신실한 마음을 가진 단 하나의 존재가 남아 있었다는 걸 내가 왜 몰랐을까
충실한 개, 개의 충실성에 필적할 만한 것이 인간 세계에는 없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주인님 죄송한데요, 여기 뼈 묻으려고 판 거거든요,
이 근처에 왔을 때 혹시 배고플까봐요
매일 산책할 때요
죄송해요, 여기가 주인마님 무덤, 쉬시는 곳이라는 건 잊어버렸었어요.
- 박선주의 영시읽기 강의 및 번역을 중심으로 -
이 시 역시 첫 줄이 제목이다. 죽은 내 무덤을 파는 게 내 무덤에 나무 심어주려는 애인인가 했더니 애인은 어제 최고 부잣집 딸한테 장가를 갔단다, 장가가는 게 그녀에게 상처주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하고. 그럼 가족인가 했더니 무덤을 잘 돌본다고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꽃은 무슨 소용인가 했단다. 혹시 적인가 했더니 내가 죽었단 말을 듣자마자 미워할 가치도 없다 생각하고 어디 묻혔는지 상관도 안 한단다. 알고보니 키우던 개여서 그 진실한 충실함에 감동하려는데 저 산책 다니는데 배고플까봐 뼈를 묻으려고 한 거란다, 여기가 주인 마님 무덤인지도 몰랐다고.
무덤 속 화자는 모두에게서 잊혀진 멀어진 자로서 외부 세계의 상징인 개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순리로 다 받아들인다. 다 자기 삶을 사는 것이고 죽는 순간 잊혀진다는 것, 잊혀지지 않고 싶은 본능적 욕망은 반드시 배신당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씁쓸함에 젖는다.
막상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죽음이 뭔지 모르겠는 것이었는데, 막상 죽고 나니 살아있는 것들이 미스터리로 다가온다. 왜 이렇게 세계가 우주적으로 나에게 무관심해지는 것인지 죽고 나서 보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 투성이이다. 사랑 애정 가족관계 애증 증오 놀람 원망 절제 체념 등의 모든 감정에 대해서도 그것이 뭐였는지 모르겠고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삶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여태까지는 죽음이 타자였고 영원히 알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면 이제 정말 두렵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삶’이 돼버린 것이다. 우주가 나에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나, 내가 한 부분에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일부였었는데 내가 떨어져 나오니까 이렇게 차가워질 수가 있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삶이란 게 뭔지 모르겠는 것이다. 진정 알 수 없고 미지의 두려운 것이었던 죽음이 타자가 아니라 삶이 타자가 돼버린 것이다. 박선주 영시 해설에서 마지막 한 시선을 찔러 주면 시는 엑스레이 사진에 조명등을 켜는 것처럼 골격 중추가 확 잘 보인다. 잘 보인다고 시를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선으로 내 삶을 비춰보게되니 고마운 시가 된다.
죽음은 삶을 다 산 후에 만나는 거니까 그것이 알 수 없는 세계라 할지라도 그 타자성의 무게가 삶 안의 공포만 할까 싶은 생각에 공감이 간다. 삶에서 만나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타자들, 친밀하다고 생각하던 대상이 문득 낯설어지기도 하고 끝없이 변하면서 '나'조차 타자로 느껴지거나 타자와 구별이 되지 않는 순간이 생긴다.
미지의 것들은 점점 많아지고,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변하니 삶의 많은 영역에서 자주 위축되고 눌어붙는다. 그럴 때면 그저 자족적인 체계 안에서 고스란히 숨만 쉬며 살던 대로 살까 싶지만 이미 우리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저 많은 타자들을 어쩔 것이냐. 그 모르는 것 투성이인 타자들과 씨름하면서 틈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결핍과 혼돈과 무지를 일상으로 견디고 껴안고 문열어 뒹굴다 보면 살아갈 만큼 숨쉴 틈도 생길 것이다.
그 옛날 갑자기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심한 태동을 느끼면서 나는 영화 <에일리언>을 본 지 얼마되지 않아 식은 땀이 나던 때가 생각난다. 내 안에 들어와 살다 나간, 내 육체를 나누어 살며 나와 구분이 안 되던 존재들, 그 엄연한 타자들과 메꾸어지지 않는 틈, 그 아픈 자유를 즐기다가 우연히 그 결핍의 틈에서 생겨나는 것들을 목격하고 싶다. 초점없이 사노라니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주변 존재들의 울림과 부름에 초점을 맞춰 응답하며 머무르는 것이 시간을 늘궈(늘려의 방언) 먹는 방법이지 싶다.
일단은 초대받은 6월말 남산 숙박 투어와 여름방학 맞이 최애 손주와의 아름다운 혼돈의 시간을 맛나게 즐겨볼 요량이다. 요즘은 톡에 누가 내 프로필에 접근하는 지를 카운트하는 기능이 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내 존재의 무덤을 파 놓고 누가 오나 턱 빠지게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삶과 죽음의 자리가 바뀌는 건 아닌가 하며 읽은 시다. 토마스 하디가 시도 쓴 것을 처음 알았고 죽은 우리 코코가 무덤 속에서 저 마음으로 있을 것 같이 오버랩 되어 짠하게 쓸쓸하면서도 재밌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