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pringProject (24.04.28)
틈만 나면 전시회를 가다. 빈틈없이 해치웠다. 우리 사이의 틈이 있다. 사람들 틈 속으로 사라졌다.
틈이라는 단어가 하나로 완결된 모습으로 다가온 시기는 군 제대 후 방랑의 시기였다. 보통은 군에 다녀오면 누구든 정신을 차린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오히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방랑의 시기에 접어들었고 작든 크든 이 방랑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방랑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쩔 수 없음에 가깝다. 처음으로 나에 대한 모순을 발견한 시기였다. '나'라는 존재 안에 틈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 이전의 시기의 '나'라고 생각했던 존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모습의 '나'가 생기면서 서로의 간극이 생겨버린 사건이었다. 지금의 어설픈 설명마저도 당시에는 전혀 떠오르지도 않는 영역이었다. 다만 매일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허겁지겁 방랑을 집어삼켰다. '너 대체 왜 그러니?'라는 질문에 아침에는 누구보다 멀쩡하고 교양 있게 '아, 죄송합니다. 잘해볼게요'를 말하고 밤이 되면 누구보다 생각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냈다. 다만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조차도 실제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벌어진 틈을 어떻게든 메우기 위해 아침에 만들어진 나를 밤이 부정하는 형태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더 충실한 삶을 유지했던 밤에는 더 신랄하게 아침의 삶을 부정하게 되었고 그 부정을 위해서 사용된 단어는 사실과 관계없이 왜곡되기도 했다. 사람의 기묘한 점은 이런 방식으로 서서히 생기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실로 거창한 이야기 같지만 현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저 사람은 평소에는 멀쩡한 것 같은데 이상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술을 좀 많이 마시지 않아?', '너무 솔직해서 무서울 때가 있어', '저런 이야기를 쉽게 하는 게 좀 별나지' 등등 현실에서의 상황은 차갑다. 물론 모든 뒷담화는 아침에 이루어진다. 역설적인 것은 아침에는 너무 멀쩡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 밤과 낮의 간극 사이의 역설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 역설은 관찰자에게는 상당히 재밌는 이야기가 된다. 부조리해 보이는 스토리는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소재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내 안의 틈조차 원래는 없던 것처럼 잠잠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인생에 있는 큰 이벤트들이다.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기고 육아를 하다 보면 그 누구보다도 아침의 내가 필요하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해서 집과 멀어진 아버지의 스토리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재다. '우리 아버지는 자유영혼이라서'로 시작해서 끝은 꽤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들어본 것 같다. 존재의 밸런스 게임에서 처참히 무너진 사람의 스토리구나 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훨씬 더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강력했던 사람들이겠구나'라는 중립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내 안의 '틈'을 마주한 순간부터 나의 판단의 주체는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철학을 유지해 온 것 같다. '아침의 나'와 '밤의 나'라는 상이하게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는 두 재판관 아래 있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가치적 판단보다는 나의 존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더 중요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 자신의 '틈'에 대해서는 최대한 묵시하겠다는 생각으로 살게 된다.
한편으로는 아침의 내가 돼버린 이후에 창의성이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도 그렇다. 아침의 나는 창조적이기보다는 유지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유리하기 원하고 변화가 크지 않기를 원하다. 그래야만 내 주변의 존재들도 안정감을 찾고 그 안정감을 가지고 생활이 유지된다. 이것은 상당히 현실적이기 때문에 책임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을 유지하고자 하면 현실은 유지되지 않는다'라는 점이다. 이전에 '붉은 여왕의 가설'과도 관련되는데 현실을 유지하고자 하면 원하는 유지의 상태보다 빠른 현실에 당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충분히 창의적이고 통찰력 있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훨씬 더 예민한 밤의 나의 도움이 절실하다.
물론 삶을 잘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보기 좋은 핑계에 불과하다. 오히려 한동안 잠잠했던 나의 본질에 가깝다는 '밤의 나'가 시간이 지나면서 '너 자신을 알라'라고 소리치는 상황에 가깝다.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의 남편과 아버지인 동시에 '나' 그 자신이기 때문에 결국 이 밸런스 게임은 나도 모르게 다시 시작된다.
다만 세월이 주는 경험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물론 단순히 경험 측면 만은 아니지만 세월의 흐름에 기인하는 많은 변화가 나의 삶에 관여하게 되는데 그중에 경험이 상당히 중요한 척도가 된다. 결국 메울 수 없을 것 같은 '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황에 따라 밤과 낮의 나를 가져다 쓰는 방식을 생각하게 된다. 최초에는 여러 번의 실패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 실패를 최소화하면서 결국에는 컨트롤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 내야 한다. 이 밸런스 게임을 다시 시작한 것이 최근이다. 물론 이 게임에는 디폴트 설정이 필요하다. 바로 내 주변의 존재에게 피해가 될 것 같은 일이 생기면 과감하게 게임을 포기해 버리는 설정이다. 이런 최소한의 설정을 가지고 최대한 열심히 게임에 임해보는 것이다.
목표하는 바는 '밤의 나'도 '아침의 나'의 환경에서 잘 써보는 것이다. 결국 통제된 환경에서 최대한 나의 본질에 가까운 예민함만 꺼내서 쓰는 방법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환경을 통제하는 것과 자극을 유지하는 것이 동시에 필요하다. 환경을 통제하는 것은 말 그대로 환경을 통제하는 물리적 방식이 된다. 이것은 수련에 가깝다. 매일 운동을 하고 모든 '밤의 나'의 조건을 '아침의 나'가 설정한 것으로 제한한다. 한편으로는 자극을 주는 방법으로써는 전시회 관람 같은 것이 있다. 이 행동이 계속해서 고민하게 하고 예민함을 유지시켜 준다.
전시회 관람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미술관'은 교육 기관이고 '갤러리'는 상업 기관이라고 한다. 갤러리의 묘하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이미지도 아마도 갤러리 공간은 최종적으로는 누구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것을 '중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작품에 금전을 지불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경제적 여유가 높은 상태이고 그런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는 점포에서는 그 고객을 타깃 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갤러리가 주는 고급스럽고 넘어가기 어려운 이미지가 있다. 물론 실제로 방문해 보면 어느 정도 고정관념에 거품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갤러리는 최대한 많은 작품을 보여주고 관객의 취향을 높여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시장이 넓어지는 방향이 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업 점포처럼 구매를 종용하지 않는다. 다만 공간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고급적인 느낌 때문에 일반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개개인이 느낄 뿐이다.
이번 전시인 UNBOXING PROJECT #3은 조각 및 설치 예술 작가를 위해 마련되었다. 27명이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녹여내는 행위다. 각각 자신의 색을 가지고 참신하게 임한다. 유능한 예술가들의 밤의 자아의 결과물이 갤러리가 제안하는 아침의 환경 위로 올려진다. 물론 이 아침의 환경은 갤러리에서 사려 깊게 배려해서 설정한 밤을 위한 사람들의 공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순서의 경험과 관계없이 작가의 소개를 한글 순서대로 한 것을 보면 분명한 아침의 컴페티션이다. (컴페티션에서는 공정함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작품을 보다 보면 27명의 작가들이 행한 아침과 밤의 자아의 전투가 치열하게 느껴진다.
몇몇에 작품에 대해서는 사진을 찍고 몇몇 작품에 대해서는 이해를 못 한 채 지나간다. 아마도 이 차이를 대중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대중성을 얻은 작가는 밤과 아침의 세계에서 그 화해에 성공했고 그렇지 않은 작가는 어떤 한 측면을 더 부곽 했을 것 같다. 그 누구도 실패하지 않았고 경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밸런스의 정도만 있을 뿐이고 관람객의 주관적 판단만 남는다. 그 모든 노력이 느껴져서 함부로 내가 찍은 작품의 사진은 올리지 못한다.
갤러리에서 작품 설명 책자를 이리저리 매칭하며 작품에 대해 이해 보려고 하는데 갤러리 앞으로 포르셰 한대가 선다. 남들은 상관하지 않는 표정으로 명품을 휘감은 중년의 부부가 내린다. 작품 설명 책자는 참고하지 않는다. 전시는 2층까지이지만 1층까지만 보고 밖으로 나간다.
'인생에서 고도의 밸런스 게임에 성공한 분들인가? 안목 같은 게 이미 내재되어서 이제는 설명도 필요 없는 걸까'. '아니면 밤의 세계 따위는 모르는 사람들일까? 그냥 거대한 거실을 인테리어에 하는데 필요하다든지..'
내 안의 존재하는 두 재판관은 언제나처럼 판단을 유보한다. 다만 밤의 세계를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며 다시 한번 빈틈 있는 밸런스 게임에 전의를 다진다.
메피스토 텔레스: 내기를 할까요? 당신은 결국 그자를 잃고 말 겁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녀석을 슬쩍 나의 길로 끌어내리리이다.
신: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괴테, 파우스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