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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zy Cow Society Oct 06. 2021

경주

죽음 사이로 살아가는 사람들

습관적으로 떠나고 싶은 회사원으로서 아주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쉽게 가고 싶었다가 쉽게 잊어버린 곳들이 참 많았다. 영화를 볼 기회가 많은 일 특성상, 이런 충동이야 말로 오후 4시의 간식 타임을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몸의 반응처럼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것이었다.


2014년 초여름 개봉한 장률 감독의 <경주>를 보고 경주로 향한 것은 2016년 늦여름의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 우연을 거듭하며 달라지는 하루, 아름다운 풍경, 충동적인 선택, 여행을 끝내면 여지 없이 사라질 순간이어서 애틋한 여운. <경주>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여행영화라고 말하기는 어색한, 타지에서의 영화다.


특정 도시에서의 삶의 풍경에 집중해온 장률 감독이 <두만강>(2009)에 이어 오랜만에 선보인 영화의 배경이 ‘경주’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주는 사람들의 터전 한가운데에 아무렇지 않게 천여 년 전의 왕릉이 즐비해있는 작은 도시다. 영화 <경주>에서 최현(박해일)이 친한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홀로 방문하고, 남편이 죽은 후 삶으로부터 부유하는 공윤희(신민아)의 찻집 ‘아리솔’이 있는 장소.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도시를 거닐며 최현은 곳곳에서 죽음의 소리를 듣고, 죽음을 맴돈다. 그래서 때로 영화는 환상 같다가도, 지지부진한 평소와 관계의 묘사로 ‘당신은 현실에 살아있다’고 일깨워준다.


영화 <경주>는 도시 경주를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 같았다. 도시도 영화도 참으로 단정하면서도 기이했고 쓸쓸하지만 부산스러웠다. 술을 마신 뒤 노래방에 간 공윤희는 산울림의 찻잔을 부르고, 커다란 고분능 정상에도 오른다.(실제론 금지되어 있으니 조심하자.) 나는 삶에 가까워지지 못하는 공윤희가 의외의 자유를 보여주는 장면들에 완전히 반해 경주에 반드시 가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일상에 치이고 게으름에 지는 동안 차곡차곡 나의 시간도 살아 흘러가서 경주도 습관처럼 잊힐 수 있었다. 하지만 끈질기게 떠오르는 초록의 풍경이 나를 끝내 경주로 향하게 했다.


도착한 경주는 39도에 육박해 매일 폭염주의보가 내리는 불구덩이였다. 살면서 겪은 최악의 더위 1위로 꼽을 정도여서, 하루 종일 에어컨을 찾아 전전하는 자본주의 여행을 보냈다. 그럼에도 낡은 녹원장 여관의 창 밖에서도, 굳게 닫힌 문에 ‘임대’가 붙은 찻집 ‘아리솔’을 영문 모르고 찾아가던 길에도, 맥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시고 가게를 나서서 또 다른 맥주집으로 달려가는 순간에도, 푸르른 능선은 분명히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것이 경주에서의 삶이었고 나의 일상에 없는 일상이었다.


경주에서 겪은 더위는 다른 의미로 영화 <경주>처럼 기묘한 경험이어서 다음 해에도 똑같은 시기에 경주를 찾고 말았다. 하지만 어느 인기 프로그램에 등장한 후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 경주는 내 기억과 많이 달라져있었다. 더위가 작년 같지 않게 견딜만하다는 점도 이상하게 실망스러웠다. 2016년의 경주는 과연 실재했던 걸까. 경주를 떠난 최현의 기억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흐릿한 꿈을 복기하듯 여름 냄새가 찾아올 쯤이면 뒤를 돌아 그저 그 해의 경주를 바라보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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