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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프생 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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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투안 Jun 18. 2023

프랑스어 구사력 겸비한 새사람 양성소 - 어학원 생존기

프생 1막 5장


어학원은 가만히 보면 참 재미난 곳이다. 다 큰 성인들이 둘러앉아 새로운 언어로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눈다.


"밥 맥었쪄?" (꺄르르)

"웅, 묵었쪄." (푸힛)

"뭐 맥었쪄?" (호호)

"안 묵었쪄." (?)


(다 같이 박수!)


과거부정문을 배울 때는 이런 대화를 듣고도 선생님이 칭찬을 하신다. 트레 비앙(très bien: 아주 잘 했어)! 맥락과 논리가 없어도 격려를 받고, 혀 짧은 소리, 새는 소리, 쌍스러운 소리도, 안 되는 혀를 굴리다가 침을 흘려도 용납이 된다. 마냥 굼떠도 괜찮다. 다 그렇게 시작하니까.




어학원이 개학을 하고 처음으로 등교를 한 날, 반 배정에 앞서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유럽 언어 기준에 따른 레벨*로 나뉜 반 중에서 아래에서 세 번째 단계인 B1반에 배정이 되었다. 그것은 내 수준이 B1이라는 말이 아니라, 학기를 마치고 났을 때 B1의 수준을 목표로 한다는 의미였다. 강남의 불어 학원에서 속성으로 봉쥬와 멕씨를 배우고 왔더니 운 좋게 A2 수준으로 인정을 받았고, 덜컥 중급 수준의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짧은 테스트가 끝이 나고 지정된 B1 강의실로 뒤늦게 들어갔더니 당연히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강남 신중성 어학원인 줄? 15명 정원 교실에 나포함 7명이 한국인이었다. 오죽하면 모국어가 같은 사람끼리 대화를 하면 안 된다는 선생님의 지시로, 중간 한자리씩을 건너 뛰어 띄엄띄엄 앉아있던 한국인들이었다. 프랑스어 빨리 배우려면 한국인이 없는 깡시골로 보내준다던 유학원의 말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동포들이 한결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야 너두?', '응, 나두.'


잠시나마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결국 이역만리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어로만 진행됐던 수업이라 초기에는 수업 내용은커녕 단순한 대화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난 누구, 여긴 어디?'가 마음 깊이 광광 울렸다. 선생님이 쏼라쏼라 하시니 다들 박장대소를 하는데, 이유를 몰라도 따라 웃었지만 매번 박자를 놓쳤다. 쿵 짜라 쿵짝에서 나는 '짝'을 맡았다. 수업이 끝나면 다른 한국인한테 쪼르르 달려가 '그때 왜 웃었어요?'라는 사이코 같은 질문을 막 해댔다. '저도 몰라요, 그냥 웃으니까 웃었어요.' 아, 다들 비슷하구나, 내가 처음이라서 '짝'인 거지, 눈치만 단련하면 '쿵'이 될 수도 있겠구나. 참 즐거운 수업이었다. 이유를 몰라도 웃으니까.


이게 정말 될까라는 의심은 접어두고 내가 그냥 스펀지가 된 것 마냥 앉아 있다 보니, 몇 주가 지나고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유머 코드가 달라도 분위기상 웃긴 얘기구나 하면 '쿵'에 맞춰 웃게 됐다. 자기도 웃는 이유를 모른다던 다른 한국인과 공감의 눈빛을 교환할 여유도 생겼다. '야 너두?', '응, 나두.'




나는 총 세 학기를 등록했고, B2 수준의 디플롬(DELF)을 받는 것을 최종 목표로 잡았다. B2는 외국인이 프랑스에서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저 요건이었고, 미대 원서를 넣을 때 반드시 제출해야 하는 증명 서류 중 하나였다. 그러니 첫 학기부터 B1반 수업을 듣다니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만약 한 학기를 말아먹는다고 해도 차례로 B1-B2를 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나는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싶었다. 언어 능력만 증명한다고 해서 미대에서 나를 받아줄 리가 없었다. 결국 '포트폴리오'라는 걸 만들어야 하는데, 입시미술의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했던 내가 당장 무언가를 창착해야 한다는 더 큰 과제가 남아있던 것이다.


아, 모르겠고 일단 언어에만 집중하자, 첫 학기에 B1 따고, 두 번째 학기에 B2 따면 마지막 한 학기가 남으니까 포트폴리오는 그때 만들자,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막무가내식 청사진은 다행히 현실이 되었다. 뭘 모르니 무서울 것 없었고, 용감한 건지 무식한 건지 일단 들이대면 어쩌다 뭔가 이루어질 때가 있는 것 같았다. 하나에만 집중하고, 그다음 넘어갈 단계를 예상하고, 실행하고, 단계마다 목표하는 지점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상정하고, 그리고 세월아 네월아 길게 늘어뜨리지 말고 목표를 이뤄야 할 데드라인을 설정하는 것.


마치 자기 계발서에 성장의 방법론으로 등장할 것 같은 그런 이야기가 나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천성이 게으르고 시간 개념은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식으로 여전히 살아가지만 그때만큼은 목표의식과 그에 따르는 동기부여가 확실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해서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는 기분은 상쾌했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에게 따로 찾아가 오늘 읽은 지문을 프랑스어로 녹음해 달라고 해서 내내 반복해 들었다. 하나에만 집중하면 됐고, 그것만 파듯이 열중하면 됐다.




먹은 밥그릇 수만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정비례하는지, 오히려 그때의 막무가내식 청사진을 그려 보기가 이제는 어렵다. 선택지는 많아지는데 하나만을 고르기가 수월치 않고, 사실 하나만을 고르면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미술은 해야 되는데 밥벌이 없이는 당장 허황된 욕심이고, 미술은 생각보다 자본주의 논리로만 따지면 인풋 대비 아웃핏, 그러니까 '효율성'이 현저히 낮은 분야였다. 돈이라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들을 알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해왔지만, 미술도 엄연히 '미술시장'이라는 시스템에서 굴러가는 분야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마음으로는 매일 새로운 기로 앞에서 어물쩍거리는 것이다.


그럴 때, 어학 시절을 떠올리면 뭔가 모를 힘이 난다. 남들 다 거치는 과정이라 대단히 드러낼 이야기도 아니지만, 개인적인 이유로는 거의 유일하게 '성장의 동력'이 완충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후로 온전히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닐지라도, 내 인생의 한 꼭지 정도는 약간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 전에 텅 빈 교실에 앉아 바라본 깨끗한 칠판의 이미지를 기억한다. 잠시 후 그 위에 무엇이 쓰일지 기다리는 순간의 설레는 감정 또한 또렷하다.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하지만 결코 잊히지 않을 기억들이다.



*레벨은 초급부터 고급 순으로 총 여섯 단계 A1, A2, B1, B2, C1, C2로 나뉘지만, 고급 수준인 C1, C2 강의는 없었다.


어학원 복도. 햇살이 좋으면 항상 사진을 찍었다.
쉬는 시간에는 어학원 뒷편의 황량한 공터를 구경했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훗날 영부인이 된 카를라 브루니의 생애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
수업을 기다린다. 설레는 순간. 쿵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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