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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투안 Mar 15. 2022

삼십 대의 사춘기

사람들 속에 섞여있을 때보다 주로 혼자 있는 시간에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나로서는 나이가 들수록 '내 사람'들의 범위도 그 넓이보다 깊이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점점 변화해왔다. 하지만 지구촌 곳곳에 떨어져 살다 보니, 몇 안 되는 그들과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다행이다.


엊그제, 베를린에 사는 나의 1호 친구 Y와 오랜만에 긴 통화를 했다. 우리 둘은 서른 중반이 될 때까지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과업들을 적어도 방관하지 않으며 충실히 살아왔는데 이 시점에서 느끼게 되는 괜한 헛헛함에 대해 동감하고 있었다.


도전했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오르락내리락 지그재그로나마 한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출발선에서 바라보았던 목표지점은 신기루처럼 그만큼 더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의 당혹감.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과연 내가 선택한 이 경로가 맞았나 싶은 의구심.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내 안의 동력이 다 바닥난 것 같기도 했던 무기력의 시간들….


그러나 다행히도 그동안 각자 조금 더 단단해지고 맷집이 생기기도 했는지 우리의 대화는 신세한탄조로 이어지지 않았다. 여태껏 당연하게 여겨왔던 지금의 '우리'가 그동안 이뤄놓은 성과 자체라는 것에 동의를 했고 그 '자기 긍정'을 바탕으로 바닥을 잘 다지고, 매일 벽돌 하나하나를 쌓듯 살아가면 조만간 멋진 집 한 채쯤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했다.


열아홉, 스물의 사춘기를 함께 지나와 서른 중반에 다다라도 우리는 여전히 고민투성이구나, 이렇게 끊임없이 성장통을 겪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시선만큼은 과거나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한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S를 만나러 가는 길

한 편 그날 오후, 한 손으로 꼽을 만한 또 다른 친구 S를 만났다. 같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우리 둘의 행보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내가 여러 핑계로 작업에 손을 놓은 채 몇 년을 지낸 것에 반해, 그녀는 여러 고초를 겪으면서도 미술 작업에만큼은 끈질기게 매달려왔다는 것이다.


S는 나를 만나러 오기 전 한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그 치열하고 지난한 시간들 끝에 자기의 작업이 진정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순간에 드디어 도달한 것이다! 그 과정들을 지켜봐온 나에게도 그 성과에 질투나 시기 같은 감정은 추호도 생기지 않았고, 그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에 온전히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함께 축하하고 싶었다. 이것은 완성된 맺음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그녀는 —프랑스식 표현대로—그녀만의 새로운 페이지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Y와 나눈 막연한 고민과 그 끝에 다다른 '매일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하면 된다.'라는 명제가 S의 이야기로 진실로서 증명이 된 셈이다. 소망은 소망으로서 물론 가치가 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다는 뜨끔한 자극이 휘몰아쳤다. 이 자극이 서른 중반의 사춘기를 지내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기폭제가 될 것 같다. 그래야만 한다. 적어도 진리에 가까운 교훈을 얻었으니 이것을 나의 것으로 잘 숙달만 한다면, 사십 대의 사춘기는 더 수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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