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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투안 Mar 15. 2022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3월이 되니 거무튀튀하고 축축한 겨울 색은 온데간데없이 쾌청한 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최근 며칠간 괜히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몸도 자꾸만 가라앉았다. 원인이야 복합적이고 다양하겠지만 분명 대선 결과가 주는 충격이 컸나 보다. 얽히고설킨 생각들을 정리를 해보려 애써 자판을 두드려보아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심란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오랜만에 '드디어' 비가 내린다

그러다 오늘 오랜만에 잿빛 하늘에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이 달라진 습도에 대한 반작용인지 도리어 생동하는 마음으로 다시 이 시간을 바라보게 된다. 명확한 답은 구할 수 없을지라도 반복되는 생각의 쳇바퀴에서 좀 벗어나 이 시간을 관조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이 나의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라는 사실은 자명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관념을 가질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일이다. 그러니 나의 몫은 이 변화의 낙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낙담 혹은 절망으로 무너질 것인지, 또 다른 희망을 마음 깊은 곳에 강단 있게 품을 것인지.


이것은 비단 외부의 세상만사를 맞닥뜨릴 때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삶에 있어 매사에 마음의 중심축을 절망과 희망 사이 어디에 두느냐, 그 자세에 대한 것이다. 인생을 치열한 전투에 비유하자면 결과를 예견할 수 없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적어도 지레 겁먹고 적을 등진 채 도망치지 않을 수 있는 용기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더라도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쉼 없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고자 끝내 진지에 꽁꽁 숨기 일쑤인 유약한 병사인 나로서는, 이런 희망에 찬 굳은 의지의 말들은 어느 누구의 거창한 성공담처럼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그 며칠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년에 남겼다고 하는 일기 중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 2009년 1월 7일'. 그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고초와 역경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한 인간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인생은 그래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 테다. 이 문장을 속으로 되뇌면서, 내가 유학시절 초기 기숙사 방 벽에 붙여놓고 자주 읽었던 박경리 작가의 시의 한 구절도 중첩되어 떠올랐다. '산다는 것'의 마지막 연이다.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2010년 나의 기숙사 방


시간은 흐르며 모든 것은 결국 변해간다. 고통의 순간들도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다 말할 수 있다고 선생先生들이 알려주신다. 시대의 정치적 사건으로부터 내 이야기로 돌아오며, 결국 또 같은 방식으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자는 것. 잠시 웅크릴 때가 있더라도 어차피 나아갈 것이라면 다시 일어나자는 것. 그리고 나도 언젠가 이날들을 회상하면서 이 짧은 청춘이 그래도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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