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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프생 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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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투안 Jun 04. 2023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
- 유학을 떠나던 날

프생 1막 1장


아! 외국인으로서의 삶이란⋯.


그렇다. 한탄 없이는 시작할 수 없고,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흐리게 되는 그런 이야기다. 말을 흐린다는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흘러 넘치는 에피소드 중에 어느 하나 골라내기가 쉽지 않아서다. 아니면 목이 메고 눈물을 훔쳐야 하거나. 그때 누군가 옆에서 다독거려주면 으앙!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한껏 쏟아내고 나면 그제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내가 왜 프랑스에 왔냐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밤을 꼴딱 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이고, 책으로 쓴다면 대하소설 뺨치는 분량이 나올 것이다.


2009년의 마지막 날, 나는 인천을 떠나 베이징과 비엔나를 경유해 파리에 도착했다.


출국 며칠 전까지 학생비자의 발급 여부가 확실치 않아서 예약과 취소를 반복하다가, 비자를 수령한 날 예정 출발일 직전에야 찾아낸 오스트리아 항공의 저렴한 편도 비행 편이었다. 비엔나 공항에서는 하룻밤을 보내야 마지막 파리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었고, 공항에서의 노숙쯤이야 제대한지 갓 몇 개월이 안 된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역대급 인천 공항과, 올림픽을 계기로 단장된 베이징 서우두 공항에 비해, 비엔나 공항은 동네 터미널 수준이었다. 규모의 문제라기 보다, 출입국 비행 편이 드문 밤이 되니 증발하듯 사라지는 여행객들, 그에 맞춰 퇴근하는 공항 직원들, 불을 끄고 셔터를 내려버린 상점들. 간혹 눈에 띄는 비슷한 처지의 타인들과 무언의 동질감을 공유하기 보다 경계심을 늦추면 안 될 것 같은 상황.


아직 어리고 세상 무서운 것이 천지인, 예비군린이였던 나는 덜컥 겁을 먹어버렸다. 게다가 수화물 무게를 줄이고자 겹겹이 입은 파카 안의 점퍼 안의 재킷 안의 조끼 안, 가슴팍 주머니에는 유학 초기에 필요할 생활비를 현금으로 감춰둔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공항 출구로 나가 눈앞에 보이는 호텔로 들어갔다. 고급과 저급의 그 중간, 잠시 눈만 붙이면 되는 비즈니스맨들에게 딱 어울리는 공항 호텔이었다.


"헬로. 하우 머치 이즈 잇 포 원 나잇?"


"이츠 백 얼마 얼마 유로."


"오케이. 땡큐우우."


예약 없이 리셉션에서 구하는 호텔방의 비용은 생각보다 비쌌다. 내가 그 돈이면 경유 두 번 하는 이 비행기는 안 탔지! 아무리 경제관념이 없어도 계산은 빨랐던 나는 하릴없이 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래 몇 시간만 버티자. 공항의 중앙에 놓인 벤치들에 당당하게 드러누울 용기는 나지 않아 한참 동안 으슥한 곳만을 둘러보았다. 12월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눕진 못해도 문 닫은 식당 앞에 내놓은 의자 몇 개를 이어 붙이니 쪼그려 누울 자리가 생겼다. 간간이 오고 가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감각은 살려둔 채 선잠에 들었다 깨길 반복했다.


첫 비행기가 다니는 시간이 되자 다시 사람들은 서서히 몰려들고 공항에는 적은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비로소 품 안의 현찰만큼은 잘 지켜낸 패잔병의 모습으로 눈곱을 떼었다. 짧은 수속과 대기 시간, 그리고 국내선 같았던 파리행 소형 비행기. 그런 것들은 멍한 기억 속에 흐릿한 이미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두 번의 경유, 세 편의 비행을 마치고, 피로에 짓눌린 몸뚱어리를 이끌고 파리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몇 년 전, 그러니까 군대를 가기 전 홀로 '두 달 살기'를 했던 파리에 결국 돌아온 것이다.


마레 근처에 있는 한인 민박 도미토리룸에 짐을 풀었다. 연말이었고 들뜬 배낭여행객들은 숙소를 자꾸만 드나들었다. 낮 관광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밥을 챙겨 먹고, 야경을 보러 다시 나가고. 게다가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샹젤리제에 카운트다운 보러 같이 안 가실래요?"


안면을 텄던 같은 방의 여행자가 저녁 식사 후 나에게 제안을 했다.


"아니에요. 저는 좀 쉴게요. 잘 다녀오세요."


완곡하게 거절을 하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분명히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파리에서 맞이하는 새해라면 흥이 나도 모자랄 판에 잠만 자는 여행객이라니.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돌아갈 기약 없이 떠나온 이의 가방이 의외로 가볍다는 건, 새로 채워 나가야 할 것들로만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생의 새로운 한 페이지는 온통 비어있었다.


2010년이 시작되는 날, 나의 유학 생활도 시작되었다.


베이징 발 비엔나행 오스트리아 항공기 안. 보름달이 자꾸만 비행기를 따라왔다.
이러나저러나 유럽 땅에 도착했다.
텅 빈 비엔나 공항.
2009년의 마지막 날, 파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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