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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May 01. 2021

이제는 실망이라는 감정조차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4살터울 둘째 남동생의 전화였다.

마누라한테는 쪽팔려서 말도 못꺼내고 말 할때는 없고 답답하고 어이가 없어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동생 핸폰으로 엄마는 이런 문자를 보냈다.


모임에 나갔더니 나만 명품백 없더라~

뤼XX가방하나만 사주라~



살아오면서 우리(막냇동생도 같은 의견이라 우리라고 적을 것이다) 부모님이 이상하다고 여겼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마다 존재조차 없던 101호 집 딸과의 비교는 늘상이었고, 앞집, 뒷집, 윗집, 골목 집.. 딸들이 있는 집은 나의 비교대상(막내동생 역시 다른 집 아들과의 비교 전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이었다. 시집와서는 다른 집 사위, 며느리도 포함 다 비교 대상의 교집합에 포함이 필수였다.


무탈하게 잘 사는 게 효도가 아니었다.

밥벌이 뻔한 자식에게 본인의 프라이드에 금이 갔다는 이유만으로 부담감을 더해줬던 엄마라는 부모. 막냇동생은 아버지가 이름만 걸면 되는 보증을 적었다가 된통 당했다. 지금의 집 명의도 와이프 이름으로 해놨다고 한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여태 진 빚에 대한 상속 포기를 하고 모든 게 깨끗하게 정리가 되면 공동명의로 바꿔준다고 했단다. 나라도 시아버지가 돈에 대한 개념이 똥 개념이면 당연히 그랬을 거다.


우리 집 삼 남매는 부모의 덕은 의식주로서 충분히 감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옛날 엄마들은 도시락까지 싼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는 말을 들으면 거기까지가 끝이다. 그것도 안 해준 집, 못 해준 집도 많지만 나 역시 다른 집과 부모들과의 비교는 이제 끝이다. 굶기지 않고 춥게 떨지 않고 아동폭력이라는 매질에서는 안전했던 거로 끝이다. 하지만 엄마 입장은 아니다. 고렇게라고 키운 게 어디라는...


삼 남매는 학교 다니는 동안 사고 한번 없이 학교 다녔던 우등생과 모범생이 썩인 남매다. 우등생은 한의사가 되었고 모범생은 공무원이 되었고 이도 저도 아닌 나는 전업주부로 산다. 그렇게 자식들이 무탈하게 잘 살면서 밥벌이 하느라 자주 못뵈도, 생일이나 어버이날 같이 식사도 하고 명절에 보는 가족인 게 자신의 프라이드에 충족되지 않아 늘 불만이었던 엄마라는 사람.


결혼 후에도 늘 다른 집 딸이 뭘 사줬느니, 사위가 어떻게 해줬다느니 하는 말은 흘려들었지만, 마음 한 쪽은 늘 실망감이 압도했다. 정말 에지간히도 딸을 벼랑끝으로 밀어버린다는 마음이 죽도록 싫었다. 나 중고등시절에도 아버지 밥 차려드려라해놓고 나이트 다녔다는 건 뒤에 알았다. 그럴 수도 있지! 암~. 늦게 고전무용 춤바람이 나셔서 한복이란 한복은 깔별로 있어야 하는데 한복 사달라고, 치마만 100만원인데 80만원이라도 어떻게 안되냐고 징징거리던 엄마의 모습이 생생한 기억이다.


2015년 나에게 크나큰 시련은 어찌 보면 철벽 방어가 된 셈이다. 큰딸이 휘청하며 집이며 차며 모든 걸 잃고 나니 더 얻을 게 없다는 결론이 난 셈이다. 그렇게 휘청거리며 넘어졌지만 친정 부모를 잘 알기에 손은 절대로 벌리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알아서 돈 빌리고 갚고 또 빌리고 갚고 그런 생활을 지속해야 했으니... 그 후론 엄마에게서 나와 다른 집 딸과의 비교는 끝이었다.


명품백-과연 효도일까?

그냥 습관이려니 하고 살아온 세월이 48년째다. 오늘 아침 막냇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니 억장이 무너진다. 친정아버지는 알콜성 치매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막내는 혼자 계신 엄마에게 저녁 식사로 고기 대접을 한 게 화근이었다. '사는 게 여유 있어 보였나'라는 동생의 물음표였다. 명품백 사달라는 문자를 받고 씹었단다. 그런데 다음 날 또 문자가 왔다고 한다. 너무 화가 나서 답을 보냈다고 한다.



'그 모임 나가지 마세요'




남편이라는 사람은 치매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잠시 가여워한 게 다였다. 그 가여워하는 모습 역시 못 땐 딸이라 그런가? 진심으로 와닿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시어머니 6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에게 한말! "니 시어머니는 복도 많다! 60전에 애들 장가 다보내고, 혼자 되니!". 과부가 일찍 되고 싶었을 만큼 남편이라는 사람을 싫어했던 마음을 나는 진즉에 알았기에 남편이 치매가 왔어도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아버지가 엄마만 안 괴롭히면 되는 거다.


명품백 사달라 소리는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눈치 없는 딸도 꼬라지 보기 싫지만, 더 눈치 없는 며느리 둘은 미워죽을 거 같은지 나보고 시누이 노릇 하라고 하셨던 몇 해 전. 나보고 그런 짓 시키지 말라고 정확히 말했다. 난 죽어도 시누이 노릇 하고 싶은 마음 1도 없으니 말하고 싶으면 시어머니이신 엄마가 말하라고 딱 잘랐다.


어릴 때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해라, 저렇게 말해라 잔소리를 너무 해대니 그대로 했다가 나만 맞아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끝까지 본인의 입장을 딸과 아들이 대신 아버지에게 대변해달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자식들에게 아버지를 조종하고 싶었으니 절대 호락호락한 아버지도 아니셨으니 중간에 낀 우리들만 안절부절못한 세월을 살았다.


실망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이렇게 글을 쓴다.

또! 여전히! 계속! 하세요. 이제는 실망이라는 감정도 메말라 버렸으니까요.



자식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로보트로 보이세요?

명품 백 사 주면 이제는 더는 아무것도 원하는 거 없으세요?

다른 집 자식들이 그렇게 부러우세요?

우리 집 자식들이 그렇게 부끄러워요?

명품백 타령하는 본인은 자식들 앞에 부끄럽지 않으세요?



이제는 속에 담아두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라도 글을 쓰고 복잡한 감정들을 내 머릿속에 지우개로 지우려 합니다. 신기하더라구요. 글을 쓰고 난 후 시간이 지나면 나의 뇌 속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어요. 달리기하면서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어두운 감정들을 거친 숨을 내쉴 때 다 떨어져나가는 개운함도 있었어요. 글쓰기와 달리기! 저에겐 심폐소생술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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