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기술면접 멘토링 9주 차 - 멘토링의 의미
이번 수업의 주제는 Recursion(재귀). 컴퓨터 사이언스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나는 recursion이라면 1학년 한 학기 내내 수없이 밤을 새우고 눈물 그렁그렁한 채로 기한 직전까지 과제를 하던 기억만 가득하다. DrScheme이라는 언어로 재귀 이론을 설명하던 그 수업은 익히 학생들 사이에서 난도 높기로 이미 유명했다. 낙오의 문턱까지 갔던 내가 전공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수업을 다 들었다는 억울함? 아까움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수업을 듣고 난 이듬해 컴퓨터 사이언스과 내 전격적인 개편 과정에서 제일 먼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 사이언스가 오늘날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할 때라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유치해야 할 판에 자라나는 새싹을 빛도 보지 못한 채로 밟아버린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 내 악에 받친 종강 피드백도 한몫했겠지)
피와 눈물로 얼룩진 기억의 recursion을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15분 전쯤 진행 중인 원격 수업에 들어와 주제를 알게 되자마자 긴장하며 재빨리 답안을 확인했다. 멘토가 해답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채 중언부언한다면 가뜩이나 헷갈려할 학생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연습문제는 직관적이었다. '다행이야 간단한 문제구나' 하는 동시에 이와 같은 문제를 푸느라 같은 수업 학생들이 모여 밤을 새우던 기숙사 공용 공간, 잊혔던 그날의 잔상이 스쳐갔다. 그땐 진심으로 나는 세상 쓸모없는 멍청이라며 자책하곤 했는데 참 멀리도 왔구나, 나.
다수의 학생들이 헤매는 터라 수많은 질문에 답변을 하다 보니 수업은 예상했던 대로 길어졌다. 이렇게 주어진 여유시간 동안 곧 이어질 멘토링 세션에서 있을지 모를 예상 질문들에 대비했는데 이 과정이 꽤나 흥미로웠다. 학생 때는 수업에서 가르치고 과제를 내주니 열심히 공부할 뿐 왜, 대체 어디에 쓰임이 있는 것인 지 고민해볼 겨를이 없었다. 누가 알려줬더라도 귀담아듣지도 않았겠지. 한데 졸업한 지 10년에 가까워 가는 이제야 어째서 공부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여유와 나름의 대답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싶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스스로 기특했다.
학생들과 함께 문제를 푸는 동안 하필이면 줌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아 나를 포함한 몇몇 학생들이 회의를 들락날락해야 했다. 그중 한 학생은 첫 문제를 풀던 도중 사라졌다가 두 번째 문제를 풀 때 합류했는데, 두 번째 문제가 첫 번째 문제의 해답을 응용해 푸는 방식이라 진도를 따라오지 못할까 내심 걱정이었다. 동시에 힘들게 첫 문제를 풀고 두 번째로 넘어와 귀여운 성취감에 차 있는 다른 학생들의 모멘텀을 막아서고 싶지도 않았다. (이럴 때 베테랑 선생님들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하다. 나는 학생 다섯을, 그것도 수업이 아닌 문제 풀이 좀 도와주는 데도 허덕이는 데 몇십 명 학생을 마주하고 강의를 하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고민하며 망설였다는 것만으로 이미 나는 선택을 한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다른 학생들은 계속해서 풀이를 해나갔으니 말이다.
세션이 끝나고 강의로 모든 학생들이 돌아간 이후에 미안함이 마음에 남아 그 학생에게 이렇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인터넷 연결 상태가 안 좋았어? 나중에라도 꼭 문제 풀어보고 답 비교해보면서 복습해보면 좋을 것 같아. Recursion이라는 게 워낙 어려운 개념이니까 찬찬히 시간을 두고 접근해봐." 조금 뜻밖의 답을 받았다. 사실은 다른 애들이 본인보다 훨씬 잘 알고 진도도 더 나가 있는 것 같아 다른 소모임에서 진행하는 강사님 해답 강의를 들으러 나갔었다는 것이다. (수업의 진행방식은 이렇다. 첫 30분에서 1시간 정도 주 강의가 있은 이후, 학생들은 작은 소모임으로 나뉘어서 직장인 멘토와 함께 연습문제를 자기 주도식으로 토론하며 푸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주 강의 방에서는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답을 함께 풀이하는 세션을 동시에 진행한다.) 마음 한편이 찌릿했다. 다른 학생들 속도에 주눅 들어 스스로 열외 하는 게 너무나 학생 때의 내 모습 같아서. 다른 애들처럼 수업 중 맘껏 질문하지도 못하고, 수업이 다 끝난 후에 머리 싸매고 혼자 해보려 허송세월 보내다 결국엔 교수님 오피스 아워에 찾아가 개인 질문하던 소심한 나. 모르겠는데 어떻게 이해가 안 되는지 설명하기엔 영어에도 자신이 없으니 교수님을 찾아가던 길에 이렇게 말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가상 시나리오를 여러 번 복기한 후에야 그 방문을 넘을 수 있었다.
어쩐지 신기하게 학생들이 잘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타인이 보는 앞에서 문제를 풀어낼 정도의 자신감이 있는 학생들만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일 수 있겠구나. 꺼내지 못한 질문과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좌절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내가 그런 학생이었는데 말이다.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은 이럴 수 있구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진 걸까? 그때의 내가 달리 어떻게 했더라면 좋았을지. 지금의 내가 이 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질문은 많으나 답은 없었다. 그저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서 나는 한 학기를 내내 머리를 싸매고 고생했던 개념이니 너는 이미 대다수의 컴퓨터 사이언스 학생들보다 앞서는 것이니 걱정 않아도 된다고 보냈다. 지금 내가 아는 유효한 격려 방법이랄 게 이 것 밖에 없다. I've been there. 나도 그랬노라고.
뭔가 대단하게 글을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는데... 쓰다 보니 이렇게 왔네
이제 멘토링도 3/4 정도 완료했다. 좀 더 다른 글에서도 풀어낼 생각이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참가해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결국 격려의 말 한마디 던져내는,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제대로 된 선생님도 아닌 내가 문제 푸는 걸 돕는 게 이상적이진 않겠지. 다만 마음 보태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이런 응원, 저런 따뜻한 말 계속 건네 보다가 우연히 필요로 했던 빈 공간에 가 작은 힘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계속 또렷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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