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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nch Toast Mafia Aug 04. 2021

승진의 의미

    승진했다. 글로 적어내자니 괜스레 간지럽다. 이번 승진이 마냥 좋고 신나는 일이었다면 쉬웠을 것도 같은데, 매니저로부터 승진 소식을 전해 들은 날부터 첫 한 3일 좋은가 싶다가 입안에 모래 한 줌 뱉어낸 것 마냥 씁쓸함이 텁텁하게 자꾸 남는다. 정식으로 Principal Engineer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전에 (전산 업데이트도 되기 전, 심지어 오른 연봉을 받기도 전인데!) 낯선 직급의 무게감이 어느샌가 소복이 내려앉아 있다.




    그간 참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빠른 속도로 무리 없이 진급을 해왔다. 물론 이전까지는 속으로 제잘난 덕이라며 으스대기도 했을 테고, 무심코 비대해진 자의식을 꼴사납게 밖으로 내비친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작년 말 처음으로 승진이 반려되었다. 치닫는 관성에 젖어 있던 나는 작은 돌부리에도 꼬꾸라져서 길을 잃고 엉엉 울었다. 제 나름 억울한 도 많았지만 그 무엇보다 우선 당황스러웠고 두려웠다. "남들보다 앞서간다고 좋아하더니 너 참 꼴좋구나. 다른 사람들 이리저리 치이면서 내실을 다져갈 때 너는 오늘의 상황을 대비할 어떤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던 거야." 속에서 불시에 자기 비난이 싹트고 번져갔다. (이때의 번아웃과 심경에 대해서는 따로 쓰고 있는 글이 있으니 중략. 언제 발행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운이라는 깨달음과 겸손은 그 운이 명을 다한 후에나 찾아왔다. (물론 승진이 까이고 나서 운이 나빴던 것이라 정신 승리하는 것 같은 머쓱함도 함께 든다) 그동안은 감사하게도 아무것도 아닌 꼬꼬마 시절부터 내게 희망을 심어주고, 싹틔워낼 수 있게끔 힘쓰고 마음 써준 사람들이 분에 넘치게 많았다. 승진이 반려되었을 때도 나보다 더 화를 내고 내가 내던져버린 자신감을 찾아다 툭툭 먼지 털어 내게 건네 준 것도 그 사람들이었다.


    익숙한 전 팀으로 되돌아갈지 꽤나 고민했다. 매혹적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승진을 거절받은 주된 사유는 결정권자들이 결국 나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나를 아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서자니... 지는 기분이었다. 오냐! 내 니들 말하는 방식대로도 충분히 승진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마, 오기 때문에 잔류했다. 그렇게 1월부터 지금까지 프로젝트 하나에 매달려 쏟아부었다. 나를 소진하는 일이었다. 그저 해내야 하는 일임을 알고 충실히, 효과적으로 해내는 일에는 자신 있지만 내가 하는 일을 중요한 '누군가'가 알게끔 '나 이런 일 했어요' 떠벌떠벌 광고하며 해나가야 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 Self-promotion(자기 홍보). 소질도 없고 생각만으로도 몸서리 쳐진다. 그 필요를 모르지 않지만, 내가 지금 꼭 필요한 말, 궁극적으로 업무와 조직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인지 내 프로필을 높이기 위해 부풀려진 말을 토해내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날이 계속됐다.


      Principal이라는 직급부터는 개인의 능력, 수행력보다는 속한 팀 이외의 조직을 아우르는 영향력, 여러 팀을 넘나들며 협업하고 명료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와 같은 업무의 수행 능력을 증명해낼 방법이랄 것이 다양한 팀의 각기 다른 업무를 맡은 사람들의 추천을 한데 모으는 수밖에 달리 있겠는가. 그런데 하필이면 나는 1년 전쯤 조직개편으로 새로운 부서에 투입되어 전원 새로운 사람들과 일하게 된 데다가, 그 시기가 코로나로 전원 원격근무가 실행된 이후라 누구 하나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승진까지 해내려니 '나라는 사람 여기 있어요.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꽤나 잘해요.' 광고해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리할 수밖에.




    그렇게 오늘이 왔다. 새로운 직함을 달고 일하는 첫 주.


    Senior, Lead 직급을 거칠 때 나는 내 일에 정진하며 스스로 업무에 필요하다 납득되는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승진은 자연스럽게 따라온 보상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번 승진은 내가 아닌 모습으로 자신을 속여 무리한 일을 저지른 게 아닐까 걱정이 든다. 한 번 꼬꾸라졌다고 주눅이 든 건지, 당연히 느껴야 하는 무게감인 건지. 어쩌면 매번 이렇게 겁부터 집어삼키는 지독한 만성 가면 증후군을 겪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놓고 보니 꽤 그럴싸 한걸?)


    생각이 꼬리를 물려는 데 마침 오늘 지난 반년을 함께 일한 동료들에게 축하인사와 함께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를 돌보는 일을 잊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다. 이번에 함께 Principal Engineer로 승진한 동료는 "우리 이번에 정말 열심히 했고 이 성취는 너도 나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어. 축하해! You are a phenomenal engineer!"라고 말해 주었다. - phenomenal engineer라는 표현을 직접 들은 것이 처음이라 뇌리에 박혔다. (역시 미국애들은 표현이 남달라. 정확히 말하자면, 이 동료는 폴란드 사람이지만...) 나도 기억해뒀다가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싶은 말이었다.


    너, 쓸데없이 심각했어. 승진, 그 무게를 뻥 튀겨서 스스로 짓누르고 있었더라. 어차피 주변의 뛰어난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1년간 새로운 팀에서 일하며 나를 믿어주고 좋게 평가해주는 또 다른 내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한 것이고 자축해도 될 일이겠지? 좀 쉬어야겠다. 좋은 일을 좋은 일로만 즐기지 못하는 데에는 그런 성격 탓도 있겠지만, 마음이 이리저리 튀는 것을 보아하니 에너지가 바닥난 탓도 있겠다. 한참을 쏟아내기만 했으니 재충전도 공들여해야지. 무엇보다 나는 내가 즐기는 이 일을 아주 오랜 시간 하고 싶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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