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내가 하는 일의 무게를 느낀다. 이제 막 9년을 꽉 채운 개발 경력엔 자연스러운 현상이겠거니 넘기고 싶다가도, 그렇다면 남들도 다들 거쳐간 고심의 길이었을까 - 어떻게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쉬이 15년, 20년이 넘게 제 몫을 해냈을까 하며 자기 소외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이란. 이제 갓 10년 차 시니어 머신 러닝 개발자로, 워낙 뉴스 사이클에 시끄럽게 오르락거리니 웬만하면 알법한 회사에서 추천 알고리즘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회사의 명성과 영광은 내 것이 아니니 일종의 name drop은 지양하는 편이다. 하지만 말해 놓고 보면 하는 일을 설명하기 훨씬 수월해지긴 하더라. 요즘 내가 하는 직업 철학적인 고민과 속해 있는 환경인 회사를 떼어 놓을 순 없기 때문에 회사 얘기를 자꾸 하게 되긴 하겠다.
돌이켜 볼 새도 없이 챗바퀴처럼 굴러온 지난 약 1년 동안 있었던 일.
- 이직에 성공했다. 이직을 준비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을 모두 브런치 글로 남겨보려 했으나 당시 현업과 이직 공부 및 인터뷰 준비에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약 한 달 반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야심은 용두사미 결말을 맞았다.
- 스스로 설득이 잘 안 될 정도의 좋은 결과로 이직했더니, 그 운을 즐길 새도 없이 테크 업계에 불황이 불어닥쳤다. 입사와 동시에 회사는 정리해고 준비에 들어갔고 작년부터 지금까지 몇 차례 레이오프를 겪어냈다.
- 와중에 ChatGPT의 성공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이 내가 종사한 분야에 쏟아졌다. 당장 잘릴 걱정을 해야 하는 건지, 잘려도 재취직 안 될 걱정은 없다니 좋아해야 하는 건지...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흔들어 나부끼는 날들이었다.
- 이런 거시적 상황이 없었더라도 새로운 회사 적응은 어려웠을 테지. 게다가 테크 리드 역할로 새로운 직장, 새로운 팀, 업무에 안착해야 하는 부담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오늘. 5월 27일이 사회인으로 처음 데뷔한 기념일이니, 꼼짝없이 이제 10년 차라는 깨달음에 머리가 아득하다. 새삼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 '나'를 지키며 직업생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본다. 진로 고민 이라니 우습지. 아무리 짱돌 같은 머리를 굴려도, 달리 더 잘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은 없는데 말이지.
내 직업이 무겁다. 무섭다. 언제든 비싼 부속품으로 전락해 잘릴지도 모른다는 고용 불안 때문일까? 아님 하는 일의 특성상 ChatGPT가 보여준 (더 놀랍게도 대중을 설득하는 데도 성공한) 잠재력과 위험성에 내가 어떤 방향으로든 일조하게 될 것이란 짐작 때문일까? 이리저리 튀고 싶은 대로 튀는 아무개의 전망에 의하면, ChatGPT가 우선 개발자부터 대체하게 될 거라지. 여기에 온갖 생각과 감정이 꼬리를 문다. 대체되기보다는 대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려나 하는 생각엔 가장 먼저 안도감이 스치고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뒤따른다. 윤리, 책임의식은 애써 외면하고 싶다. 폭넓은 식견과 인류애를 가지고 처절하게 고뇌한 끝에 모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줄 현자의 도래를 기다린다. 나 정말 하라는 대로 잘할 수 있는데.
마냥 응석 부리고 누군가 시키는 대로 키보드에 코 박고 일만 하고 싶어. 하지만 원하지 않더라도 나이는 계속 먹는 것이고 어른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다는 최소한의 나잇값은 하자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신조라서 도망갈 곳이 없다. 이 일을 밥벌이로 하고 있는 동안은 감히 가야 할 곳,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줄 그릇은 안된다 하더라도 현업 종사자로서 가치고민과 윤리 걱정을 그만둘 수는 없겠지.... 그런 일련의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그럼 다른 일을 해볼까? 하며 생뚱맞은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일요일 오후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당장 해야 하는 일이 GPT, Large Model에 관한 일이다 보니 핑계가 좋았고. 10년 정도 하면 일도 인생도 좀 쉬워지고 편해질 줄 알았는데 에잇. 아무리 레벨 업을 해도 끝판왕이 안 나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