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nch Toast Mafia May 22. 2021

스몰 토크

이것도 업무의 일부분인가요?

    개발자는 소심하고 말주변도 없는 데다 사교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에 일조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말이지...... 에라 모르겠다. 가끔은 '그래, 나는 개발자니까 이런 거 좀 못해도 되지 않나?' 비겁한 변명 뒤에 숨고 싶을 때가 많다.


    입사 후 첫 몇 년 동안 꽤나 괴로웠던 때는 바로 엘리베이터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친 순간. 애매하게 얼굴만 몇 번 익힌 회사 사람과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는 정신이 아찔하다. 그 잠시를 견디지 못하는 내게 점심 1시간 동안의 스몰토크는 업무보다 더 한 부담이었다. 일이 너무 많아 점심 먹을 시간도 없는 척하려 하면, "아 그거 그렇게 급한 거 아니야. 천천히 해. 밥은 먹어야지" 하는 고운 마음씨에 반사되어 비치는 내 내적 방황.


    오늘은 자기 고백의 날인 셈 치고 좀 더 터놓고 가보련다. 유독 도저히 발음 못하겠는 이름(으뷀레엘레 하고 혀가 꼬이는 느낌)을 가진 그 누군가와 어쩌다 걷던 방향만 맞는다 싶으면 지레 겁을 먹고 '앗차차. 난 분명 방금 내가 온 곳에 뭔갈 두고 왔어. 하하하 나란 인간이란.' 하는 믿어주는 사람도 (관심 가지는 사람도!) 없는 내면연기를 하면서 홱 뒤돌아 다시 걷는다. 상대방이 반갑게 안녕! 하고 나를 불러주었는데, 내가 화답하며 그의 이름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더 어색하게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어떨 땐 '아유 계단이 건강이 좋지.' 자기를 속여가며 복닥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피해 고단하지만 대신 맘껏 고독할 수 있는 계단을 택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스몰 토크. 업무의 일부분 맞습니다. 제 경험은 그랬어요.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가진 재능보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미국이라는 에서 7년을 꽉 채워서 일해본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스몰 토크는 관계의 윤활유가 된다. 상대에게 보이는 또는 상대가 내게 베푸는 작은 호감 또는 관심의 표현이다. 물론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학생 때 취업박람회를 가면 으레 그래야 한다니까, 취직은 해야겠으니까 입술에 경련을 느끼도록 억지미소를 지으면 연습한, 대답이 궁금하지 않은 스몰 토크를 해댔다) 그래도 세상에는 순수하고 좋은 마음으로 스몰 토크를 건네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 믿는다. 업무에만 국한되지 않은 가벼운 대화를 통해 간밤에 내린 눈이 소리 없이 쌓이 듯 서로 유대감이 싹트고 훗날 더 크고 의미 있는 관계의 토대가 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문득 깨닫는다. 아, 이 사람도 사람이구나. (바보 같은 표현이군.)


    여기서 정말 중요한 점. 안전하고 상호 편안할 수 있는 주제로 대화해야 한다. 이 경계를 벗어나는 대화는 스몰 토크가 아니다. 연애는 해? 데이트는 어디로 가? 이런 건 Invasion. 사생활 침해에 더 가깝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사적인 얘기를 꺼내 준다면 나는 속으로 참 고마워한다. 아, 이 사람이 내게 이 정도의 마음을 열었구나. 암묵적으로 주고받은 오늘의 신뢰는 내일의 업무 진행에 소소하지만 확실한 훈기를 불어온다. 여기서 다시 마음속으로 체크하는 것이 있다. 상대가 멋대로 내가 묻지도 않은 사생활을 공유하고는 그에 상응하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화답하기를 바라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실수로라도 그러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초반 몇 년은 동료와의 관계, 소위 얘기하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진급을 계속하다 보니 차츰 내 능력으로만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팀의 경계를 넘어서 얼마나 영향력을 끼치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해졌다. 차곡차곡 쌓아온 호감의 관계 설정이 업무의 진행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결국엔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생각의 변화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스몰 토크에 갖는 부담감 때문에 다정하게 건네 오는 말을 멋대로 빈껍데기라 치부하고 외면하는 게 참 꼴사납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싫은 것은 불편함이지 대화가 아니었다.

  

    먼저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스몰 토크의 이면에는 소소하고 무난한 주제라는 경계가 있었다. 깊이 없는 대화에는 진심을 담을 수 없다고 넘겨짚어 왔구나. 그렇다면, 진심을 담으면 되지! 진정으로 상대에 관심을 가지고 묻는 안부와 근황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내가 설정한 진심은 스몰 토크에 스쳐가듯 지나간 말 한마디라도 기억해 기회가 될 때 언급하거나 챙겨주는 일이었다. 방어적인 내 성격이랑 잘 맞았다. 제 얘기를 조잘조잘 늘어놓아서 활발한 대화를 이어나갈 수도 있겠으나 그게 힘든 나는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하는 세심함에 초점을 맞췄다. 대단할 것은 없다. 안녕! 나 네가 지난번에 맛있게 먹었다던 식당가 봤어. 정말 맛있던걸? 하거나, 너 요즘도 자전거 열심히 타? 날이 더워졌는데 주로 어디로 타러 가니? 하는 식이다. 내쪽 이야기는 크게 꺼낼 일이 없이도 몇 번의 오며 가는 스몰 토크에 한층 가까워진 관계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 얘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동시에 관찰을 통해 내가 잘 소화할 수 있는 표현과 잔잔한 기술들을 수집했다. 누구는 How are you [doing]? 같은 무난한 말로 포문을 연다. 세상 활달한 사람들 중에는 "와! 오늘 날씨 진짜 죽인다. 친구!(Hey, good friend) 오늘 기분은 좀 어때?" 하며 자신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인사말 하나로 전파한다. 이건 패스. 소화 못 할 음식을 쑤셔 넣어 봤자 체하기만 할 뿐. 나는 이상하게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의 과정이 간지럽달까. 주입식 교육의 잔상이 너무 커서 I'm fine으로 대답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면 교과서 삽화의 철수, 영희가 되는 기분이다. 나는 How have you been? (<- 이상하게 난 이 표현이 좋더라) Lunch yet? (밥은 먹었어?) 하고 안부를 묻는 동시에 식사를 묻거나 (뼛속까지 한국인) 주말에 한 일을 물어서 한 번에 두 가지 화두를 던진다. 대화의 갈래가 다양해지면 마치 정해진 공식을 따르는 듯한 기계적인 어색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초반에는 주말엔 뭐했냐는 질문에 대체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쉽게 의기소침해졌다. 다들 뭘 그렇게들 재밌고 의미 두둑하게 여가를 보내는지. 그럴 땐 역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는 사람 역할을 한다. 스스로 좋은 주제를 던질 자신이 없으니 공을 상대에게 넘기는 것이다. 늘 이렇게 빠져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몰 토크를 할 때 늘 쉽게 꺼낼 수 는 나만의 토픽을 하나 선정해둔다. 내 경우에는 실내 암벽등반. 샌프란시스코취직해  이사 온  꾸준히 하고 있다. 내겐 일상이 되어 대단치 않다고 넘기기 쉬웠는데 꽤나 신기해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실내 암벽등반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등 이야기의 가지가 많이 뻗어나갈 수 있어서 쓸모가 있다. 간혹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을 만나거나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단숨에 친해질 수 있다. 생각을 달리 할 필요가 있었다. 나한테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 주말에 뭘 했냐는 질문에 '별 거 안 했지 뭐'하고 넘어가는 게 미안해졌다.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방이 이런 대답을 해온다면 이상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 막막하니까. (요즘 나는 '그래? 정말 휴일엔 쉬는 게 최고지!'라고 대답한다) 사소한 무엇이라도 상대방이 계속 대화를 해나갈 수 있는 것 하나는 던지려 했다.


    에너지가 고갈되고 반가운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을 땐 회피도 많이 한다. 사무실에 출근하던 때엔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눈인사를 하며 다가온다. 마침 이어폰이 귀에 꽂혀 있다면 표정으로는 세상 반가운 체하면서도 이어폰을 가리키면서 소곤소곤 '나 지금 원격회의 중이라' 한마디면 끝. (거짓말은 거짓말인데요... 이렇게라도 내 시간을 지키고 싶을 때가 있는 거잖아요?) 너무 애쓰며 살지는 않으련다. 모든 스몰 토크를 받아 내다가는 몸살 걸릴지 모르니까.



    요즘은 인턴이나 신입들에게는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한다. 나는 네게 관심이 있고 나를 편하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혹시 불편하게  걸까 하는 걱정도 되고, 그 옛날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들도 이런 좋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어림잡아 보기도 한다. 해보니 별거 없더라는 말이 있다. 스몰 토크는 해보니 별거 많더라.



Banner Photo by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적록색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