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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 Jun 30. 2023

공익 활동가의 번아웃

ep1_어느 날 찾아온 번아웃으로 휴직을 선택하다.


"또 한숨이야?"

아내는 언제부턴가 한숨이 잦아진 나를 '긴 한숨씨'라고 부르며, 한숨 좀 그만 쉬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퇴근 후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대어 반쯤 누운 채 멍하니 야구경기 중계영상을 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멍한 상태였다. 평소 야구경기를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볼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스퀴즈(Squeeze)'

야구에서 3루 주자를 어떻게든 홈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희생번트 작전을 스퀴즈라고 하는데, '쥐어짠다'는 단어의 의미가 떠올랐다.

소파에 누워 멍하니 야구를 보다가 요즘 나의 일상이 스퀴즈의 연속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하루하루 일터에서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듯 생활하다가 즙을 모두 뱉어내고 쪼그라든 레몬조각처럼 소파 구석에 드러누워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매일을 쥐어짜며 남은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괜찮은 건가? 언젠가 모두 쥐어짜지면 그 순간부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답답한 생각들은 답을 얻지 못하고 긴 한숨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아내가 불쑥 내민 스마트폰에는 우울증 자가진단 설문이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내는 예방차원으로 정신건강 상담을 한 번 받아보라고 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정신건강센터가 있다며 상담은 무료니까 꼭 한번 상담을 받아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평소 어디가 아파도 병원에는 잘 가지 않던 나도 무언가 낌새가 이상했는지 아내의 강권에 못 이기는척하고 센터에 상담예약을 잡았다.



상담센터는 대로변 상가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꽤나 자주 지나다니던 곳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정신건강센터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건물의 입구에서 3층까지 좁은 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건물 안의 차가운 공기와 계단의 광택이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라도 되는 것처럼 불편한 기운을 내뿜었다.


평범한 사무실처럼 생긴 상담센터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다잡고 센터의 유리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상담하러 왔는데요."


얼마뒤 담당 상담사가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났다.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를 픽업하러 온 것 마냥 밝은 태도로 조그만 상담실로 나를 데려갔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어떤 이야기라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 상담사를 보며 하나, 둘 이야기를 꺼냈다.

일터에서 이런저런 감정의 소모를 겪으며 계속해서 기운이 빠지지만 다시 회복되지는 않는 일상과 부정적인 생각들과 무기력으로 가정생활에 죄책감이 쌓여가고 있음을 장황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사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상황과 상태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해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괜찮은지 혼란스러운 상태로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뱉어냈다.


이야기를 듣던 상담사는 가장 먼저 우울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확인했다. 아마도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나 사고 등을 예방하는 것이 센터의 가장 큰 목적이 아니었나 싶다.

상담사는 나의 상태가 그렇게 위중한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번 아웃'이 온 것이라며, 일터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루고 있고 현재도 잘하고 있는 걸로 보이지만 누구나 그 과정에서 번아웃을 겪을 수 있다고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는 의견을 전해주었다. 취미생활 같은 것을 찾아서 여유를 되찾아보라는 위로를 끝으로 상담은 종료되었다.


나름 기대했던 나의 첫 심리상담은 '번아웃'이라는 단어만 남긴 채 조금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하지만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번아웃'이라고 나의 상태를 표현하자 이제야 내가 진짜 번아웃이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실 번아웃의 뚜렷한 증상이 무엇인지 나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잘 알지는 못한다.

그저 하루하루 업무를 하며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수위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사실 직장에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적당한 스트레스는 텐션을 유지하여 업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 정도가 심해졌던 것 같다.


비영리 단체이자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업무에서 오는 긴장감이나 스트레스는 나름의 사명감으로 버텨왔던 것도 사실이다.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그리고 함께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지키기 위해 조금 더 애써서 일할 수 있었다.

일반 영리 기업 들은 이보다 더 심하다더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힘든 상황들을 마주하면 그것을 이겨내며 성취를 느끼고 그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성취감을 찾기가 어려웠다. 퇴근 후에도 지인들을 만나거나 취미생활이나 다른 활동을 할 에너지는 없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서 대부분의 상황에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지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고, 번아웃이라는 진단까지 내려지자 무언가 멈추고 변화하는 계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직이나 퇴사결정처럼 하루하루의 일상을 바꿀만한 대단한 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일터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과 책임이 있었고 가족들과의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몇 개월이 흐르면서 매일 같이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돌덩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판단을 하고 잠시 멈추는 결정을 하였다.


육아휴직.


잠시 멈출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육아휴직을 선택했다. 일터에 사정을 이야기해 양해를 구하고 휴직을 요청하고 아내와도 상의를 하여 몇 달간의 휴직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실제로 아이들의 육아를 위한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에 나의 쉼과 아이들의 육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결정이었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며 휴직을 마주할 수 있었다.


휴직기간 동안 여행이나 취미활동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부업이나 아르바이트를 해보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일에서 거리감을 갖고 좀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심했다.

휴직을 가장 반기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그동안 아빠와 시간을 함께 보낼 기회가 많지 않아서였는지 이것저것 같이하자며 한껏 들뜬 모습을 보니 나도 기대가 되었다.


잠시 멈췄다.


그동안 애쓰며 고민해 왔던 일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나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일에 대한 생각도 함께 정리해 보고 싶다. 이 시간이 긴 여행길의 오아시스 같은 소중한 시간이 되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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