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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다지 Dec 17. 2021

우간다 캄팔라 완데게야에서 살았던 썰_1

우간다 캄팔라 생활 

오후만 있는 어느 일요일 바람이 많이 불던 날, 내 방문에서 바라본 내 방과 바깥의 풍경

 우간다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는 마케레레(Makerere)대학교가 자리한 완데게야(Wandegeya)에는 호스텔이 몇 군데 있어서 타지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자취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나는 2010년~2012년까지 완데게야에 있는 아캄웨시(Akamwesi) 호스텔에서 지냈고, 그보다 앞선 2009년에는 교환학생으로 온 한국인 친구들이 지낼 때 몇 번 가서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으니 나와 완데게야와의 인연은 꽤 깊었다고 할 수 있겠다.


캄팔라 로드에서 마타투(미니버스 Matatoo) 기사들이 호객 행위를 할 때 “완데게야 캄우차(Wandegeya Kamwocha)”라고 랩을 하듯이 말하는 그 완데게야가 내가 살았던 곳인데, 시내와도 가까워서 그럭저럭 교통도 훌륭했다. 한국으로 치면 신림동 쯤 되는 완데게야는 학생 주거 밀집지역에 걸맞게 음식이나 술값이 저렴한 편이었고 길거리 음식들도 다양했다. 게다가 치킨 투나잇(Chicken Tonight)이라는 유명한 치킨집을 중심으로 치킨집도 여러 군데 있어서 나중에 저승 가서 닭한테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닭은 질리도록 먹었다. (2013년 12월 KFC가 우간다에 상륙하기 전에는 치킨 투나잇이 최고였다)


호스텔 월세는 당시 한달에 200불이 조금 넘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금액은 기억이 안 난다. 그 돈에 조금 더 보태면 부코토(Bukoto) 쪽 인도인들이 사는 작은 다세대 주택 월세와 얼추 비슷했으니 그리 저렴한 월세는 아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하는 학생들 또한 호스텔에 살 정도면 집안의 지원이 꽤 빵빵한 수준이라고 보면 될 정도로 호스텔에 사는 학생들의 차림새는 꽤 화려했다. 한국의 남자셋 여자셋이나 논스톱처럼 우간다도 대학생들의 학업, 생활, 연애를 주제로한 시트콤이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호스텔에 사는 것이 대학생들의 로망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맞은 편에 변기가 보일 정도니 방이 얼마나 작은 지 짐작이 되는가. 나물을 무치겠다고 야채를 데치는 모습.
내가 만든 반찬들의 모습. 눅눅해진 김을 살려보겠다고 볶았는데 김가루가 아닌 김덩어리가 되었더라.

완데게야의 호스텔 중에서는 아캄웨시가 그나마 방과 샤워실이 넓었는데, 지금은 아마 더 좋은 호스텔도 많이 생기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총 4층까지 있었던 그 호스텔은 한국의 원룸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싱크대가 없어서 변기가 딸린 샤워실의 샤워기 아래서 식재료를 씻고 침대 옆에서 요리를 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붙박이 장롱과 책상, 플라스틱 의자,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가 제공됐는데, 싸구려 매트리스라 그런지 거의 메모리폼 수준으로 잠자는 자세를 기억하는 바람에 허리가 아파서 새로 사야했다. 밥상도 따로 없어서 새로 사야 했지만 사지 않고 빈 박스에 빈 병을 넣어 테이프로 붙여서 테이블을 만들었다. 작은 냉장고, 핫플레이트, 밥솥, 그릇, 숟가락, 젓가락이 내가 가진 살림의 전부일 정도로 단출하게 살았는데, 방 자체가 좁아서 누구든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저녁 7시가 돼서 퇴근하면 도착하자마자 바로 씻고 그날 입었던 옷을 물에 담그고 세제를 풀어 빨래를 했다. 돈 주고 빨래를 맡길 수도 있었지만 내가 빠는 게 제일 깨끗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매일 빨았다. 빨래 후에는 청소를 하고 밥을 먹었는데, 쉬는 일요일에 미리 반찬을 만들어 놓고 냉장고에서 꺼내 먹기도 했지만 잦은 정전으로 상할 때가 많아서 그때 그때 만들어 먹는 요리를 주로 했던 것 같다. 나카세로(Nakasero)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해산물 가게가 있어서 탄자니아에서 가져온 꽃게도 종종 쪄서 먹고 갈치도 사다 조려 먹었다. 당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난 직후에는 고등어의 원산지를 물어보면 대부분 일본이라고 하는 통에 제대로 먹질 못했다. 그때 정말 일본산 고등어를 팔았던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메뚜기야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니... 매일 청소를 했지만 흙먼지는 똬리를 튼 뱀처럼 방안 곳곳에 내려 앉아 있었다.

건기 때는 가끔 메뚜기들이 4층의 내 방까지 날아들었다. 메뚜기를 조심스럽게 집어서 창문 밖으로 날리면 호스텔 바로 옆 주택가의 사람들이 “칭총, 칭총”이라고 말하며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나를 놀려 댔다. 지겨웠다. 길가에 나가 음료수라도 사 올라 치면 모르는 남자가 불쑥 나타나 엉덩이를 만지고 사라졌다. 하루는 친구를 만나러 노트북 가방을 등뒤로 매고 시내에 나갔는데 누군가 내 가방을 몰래 열어 노트북을 가져가려던 찰나 바로 뒤 돌아서서 노트북을 지킬 수 있었다. 그 트라우마로 인해 나는 지금도 외국에서 백팩을 맬 때는 앞으로 맨다. 완데게야에서 살면서 물론 좋은 친구들도 만났지만 익명성에 기대어 외국인을 함부로 대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지금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비단 완데게야 뿐만 아니라 캄팔라 어느 곳이든지 아시아인 특히 여성들에게는 편안한 장소를 내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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