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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다지 Dec 17. 2021

우간다 캄팔라 완데게야에서 살았던 썰_2

우간다 캄팔라 생활

혼술의 동반자, 나일은 사랑입니다.

 우간다에서 일할 시절 주6일을 일하고도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야 할 때가 많아 몸이 고단했는데, 그 당시 우간다에서 내가 아는 한인들은 대부분 주6일 노동+일요일 교회의 일정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퇴근 길에 길가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 안심 1킬로를 사고, 숙소 앞 가게에서 나일 맥주 3병을 샀다. 바닥에 앉아 핫플레이트에 후라이팬을 놓고 안심을 구워서 기름장에 찍어 입에 넣은 후 매운 고추를 한입 베어 물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듯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고기와 맥주를 먹고 마시는 게 금요일 밤의 낙이었다. 토요일이 제일 바쁘긴 했지만 퇴근이 빨라서 금요일이 혼술에 제격이었다. 토요일에는 여러 사람과 어울려야 했기에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여유롭게 즐기는 건 금요일이 제일 나았다.


전기가 불안정해서 핫플레이트를 쓰면 갑자기 정전될 때도 있었는데, 요리를 하다가 전기가 나갈 때면 핫플레이트를 복도로 들고나가서 요리를 계속했다.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서 라면을 끓이면 라면 냄새가 온 복도에 진동했다. 때때로 단수라도 될라치면 제리캔을 들고 밖으로 나가 물탱크에서 직접 물을 받아 제리캔 하나를 가득 채웠고 20kg 정도 되는 걸 낑낑 대며 4층까지 들고 왔다. 물론 돈을 주면 제리캔을 방까지 들어다 주는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호의와 서비스를 구분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던 상태라 "돈을 주면 도와주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서 뭐든 스스로 해결했다.

마사카 치왕갈라에 갔다가 얼떨결에 얻어온 토끼의 모습. 그 당시에는 토끼의 생태를 몰라서 무작정 방에서 키웠는데, 정말 토끼는 방안에서 키울 수 없는 동물이었다.

아캄웨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이라 그런지 매너도 좋았고, 살면서 이웃 때문에 크게 불쾌했던 적은 없었다. 다만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애정행각을 Surround로 청취해야 할 때가 많았다. 원칙적으로는 외부인을 들일 수 없었지만 경비에게 뇌물을 주거나, 따로 비용을 지불하면 방에 누군가를 데려와서 잘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호스텔에는 현지인 대학생들도 많았지만 콩고, 부룬디, 르완다에서 온 외국인 대학생들도 많아서 다양한 언어들이 들리곤 했다. 우간다는 아프리카 비영어권 인접국들에게는 영어교육의 메카로 통하고 있었던 터라 영어를 배우러 우간다에 오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았다.


우연히 소말리아에서 유학 온 여성들을 만났는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과 몇 차례 만나서 밥도 얻어먹고 이야기도 나눴다. 평소 소말리아라고 하면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라고 생각해왔는데, 약혼자는 소말리아에 있는 상태에서 자기만 영어공부 하러 왔다는 말이 놀라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들은 개그콘서트도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백재현 이야기를 하며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개그콘서트에 백재현이 나왔던 게 2000년대 초반인데 그때부터 한국 방송을 소말리아에서 봤다는 것인가. 아니면 옛날 방송을 보고 재밌다고 여겼던 것인가. 잠시 혼란스러워졌지만, 소말리아에서 한국의 개그를 이해하고 웃는다는 점이 무척 신기했다.


숙소는 매일 청소를 해도 구석 구석 먼지가 매일같이 쌓였다. 방안의 먼지를 쓸어서 문 밖으로 밀어내면 아침마다 호스텔을 청소하는 사람들이 치워주었다. 어느 날 저녁 어김없이 방을 쓰느라 방문을 열어두었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방문 앞에 서서 인사하였다. 엉겁결에 인사를 한 나는 황급히 방문을 닫았고 한시간 쯤 지나자 방문 밑으로 쪽지가 스윽 들어왔다. 뭔가 싶은 마음에 쪽지를 열어보니 아까 방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보낸 것이었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후로는 무서워서 방문을 잘 열지 않았다. 방문은 정말 방문처럼 생겨서 열쇠로 잠그는 게 다였던 지라 걱정이 돼서 방문 앞에 의자를 두고 잤다. 혹시라도 내 방문을 열거나 하면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겠지 싶었는데, 다행히 내가 사는 2년 동안 별다른 사고는 없었다.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미로 쪽지를 썼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반가운 마음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해질녘 캄팔라의 모습. 아마 부간다 로드 어느 쪽이었던 것 같다.

우간다가 좋아서 돌아온 우간다였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우간다인들을 상대로 돈을 버는 일을 하며, 우간다인에 대해 "깨는" 순간들을 자주 맞닥뜨려야 했었다. 우간다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캄팔라"라는 도시에서, 그 치열한 사람들을 상대로 일하고 생활하는 것도 기가 빨리는 일이었다. 한적한 치왕갈라에서 농사를 짓고 가족들과 오손도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만 우간다라고 여기다가, 오토바이 경적소리/교통 체증/사람들 간의 다툼 등 번잡하다면 번잡한 캄팔라의 모습을 보니 환상이 다 깨졌지만, 사실 치왕갈라도 캄팔라도 모두 같은 우간다의 얼굴이었다. 내가 사랑한 우간다가 이토록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 나의 과오이기도 했다.


열악하다면 열악했고 위험하다면 위험했던 호스텔 생활이었지만 내 스스로 내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이 재밌기도 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고맙다고 말하는 상황이 싫어서 항상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나로서는 내가 핸들링할 수 있는 단출한 생활이 참 마음에 들었다. 물론 고마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서 도움도 많이 받으며 인간이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기도 했지만, 누구의 의견에도 동조하지 않고 나만의 우간다를 정의해보고자 독립적으로 살아본 경험도 즐거웠다. 폭풍우가 쏟아져서 온 거리가 물에 잠긴 날, 가까스로 잡은 마타투가 웃돈을 내라고 하자 화가 나서 종아리를 걷고 물길을 헤치고 집에 온 날이 생각난다.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고집스럽게 밀어부쳤던 그때의 내가 너무 웃기면서도 그리운 건 다시는 나에게 그런 시간이 안 올 것만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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