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위에서 생각하는 거버넌스
다시 시차가 바뀐 생활 탓에 오전은 몽롱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 같다. 오늘 들었던 강의는 보건과 거버넌스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보건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는 분야지만, 거버넌스는 개발협력 모든 분야의 사업 추진 단계에서 고려돼야 하는 범분야 이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었다. 거버넌스의 개념은 정치학/행정학/개발학에서 조금씩 다르게 설명되는데, 일단 개발학에서 말하는 거버넌스란 “국가의 능력(State’s capability)로서 정치, 행정, 사법 전 분야에서 제도를 관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 나름대로는 수원국의 법, 제도, 행정 등을 시정하여 공여국의 지원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거버넌스라고 해석해보았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짧은 토론에서 아랍의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자스민 혁명 이후 신작로 내니 문둥이 지나간다는 말처럼 혁명을 위해 흘린 사람들의 피가 무색하게도 다시 혼란에 빠져버린 아랍의 국가들. 이 사례를 통해 과연 민주주의 혁명이 과연 이들 국가를 안전하고 평화롭게 만들었는지 의문이 든다고 의견을 밝혔다. 어떤 분께서 한국은 (유교의) 과거제도의 영향으로 공부하여 출세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오늘날의 발전을 일구었다는 말씀을 하자, 한국의 발전 또한 종자론(될 종자는 되고 안될 종자는 안된다)으로 설명돼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거버넌스 분야가 특히 어려운 이유는 지원 대상이 되는 국가의 복잡다단한 정치, 역사, 문화 등을 총망라해야 한다는 점인 것 같다. 하지만 어느 분야를 보더라도 거버넌스가 고려되지 않은 사업들은 없기 때문에, 교육 사업을 하건 보건 사업을 하건 농업 사업을 하건 거버넌스를 빼고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사업을 통해 만나는 직간접 수혜자들(학생, 교사, 주민, 족장, 공무원 등)의 특성과 기대를 파악하고 이들이 좋은 사업파트너가 될 수 있도록 계획을 짜서 이들이 우리 지원 없이 스스로 사업을 “잘” 이끌어가게 하는 것 또한 거버넌스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과거 공모사업에서의 실패로 인해 거버넌스가 유독 어렵게 느껴지는 듯하다…
지속가능개발목표(SDGs) 16번은 거버넌스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들을 포함하는데 이 중 눈에 띄는 것은 “모든 형태의 부패 및 뇌물 수수의 실질적인 감소”였다. 이걸 보니 내가 말라위 운전면허 시험장에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우간다에서 얻은 운전면허를 분실한 후 말라위에서 속성으로 취득하고자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한 후, 연습면허를 발급 받기 위해 Road Traffic 내에 설치된 시험장으로 갔다.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학원 강사는 나에게 진행비 명목으로 돈을 요구했다. 접수비보다 많은 비용이라 어리둥절했지만 시험을 빨리 볼 수 있다는 강사의 말에 돈을 건넸다. 모세의 기적처럼 기다란 줄을 뚫고 시험장에 가뿐히 들어서자 시험 감독관은 나를 구석으로 안내했다. 교통 신호와 그 의미를 서로 연결 짓는 쉬운 문제였는데, 그는 내가 6번을 풀면 손가락 3개를 접고 11번을 풀면 손바닥을 폈다. “시험을 빨리 볼 수 있다”는 건 감독관에게 돈을 주면 감독관이 답을 알려준다는 의미였다. 시험장 벽에 붙은 “No corruption” 포스터는 존재 이유가 의심되었다.
부패방지와 전산 행정 구축을 위해 시험 결과를 전산시스템에 바로 입력하는 방식의 개선이 이뤄진 것일 텐데, 행정이 발전한 만큼 부패 또한 진화한 모습을 보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는 행동을 예방할 수 있을까 고민되었다.
더 무서운 점은 누군가 감독관에게 돈을 주고 시험을 보면 시험을 빨리 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직하게 줄을 선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시험을 빨리 본 만큼 줄을 선 사람도 빨리 시험을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 부패의 벨트에서 손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게 돼 버린다. 감독관은 돈을 챙겨서 좋고, 응시자는 시험을 빨리 봐서 좋고, 줄을 선 사람도 시험을 빨리 봐서 좋고. 손해를 본 주체를 굳이 찾자면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제공해 준 원조기관일 것이다.
거버넌스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내가 겪은 것을 대입해보는 과정을 통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진화하는 부패를 어떻게 척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차라리 부패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는 용인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정신건강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