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다지 Dec 30. 2021

2011년의 우간다 카라모자 여행

진짜 트럭 타고 여행한 이야기

카라모종(Karamojong) 부부로부터 정체 모를 자갈을 구입하는 모습

출처: https://lalitkumar.in/blog/uganda-famine-famous-photograph/ Uganda Karamoja Famine, Mike Wells

 1980년 우간다 카라모자(Karamoja) 지역을 휩쓴 기근으로 60% 이상의 유아가 목숨을 잃었던 상황을 다룬 사진 "우간다 카라모자 기근 Uganda Karamoja Famine"는 같은 해 세계보도사진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희고 두툼한 성인 남성의 손 위로 힘없이 올려진 작고 앙상한 아이의 손을 보기만 해도 콧등이 시큰해졌던 것도 잠시, 곧 비슷한 류의 수많은 사진과 영상들을 보며 처음의 충격이 점점 사라졌던 것 같다. 사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아프리카는 대개 질병과 기아로 허덕이는 모습이 대부분이어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난 우간다는 "여기가 아프리카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 사진을 다시 만난 건 캄팔라 로드의 어느 서점에서 "카라모자"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발견했을 때였다. 나는 사진집을 무척 사고 싶었지만 비싼 가격 탓에 구매를 포기한 대신 직접 가보기로 마음먹고, 2011년 휴가 때 동생과 함께 카라모자를 방문했다. 우리는 우간다를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여행했는데, 동부 지역에서는 시피 폴(Sipi fall), 키데포 국립공원(Kidepo), 카라모자를 보기로 했다. 큰 틀의 계획(날짜와 목적지)만 짠 우리는 론리 플래닛 하나 들고 버스와 보다보다(Bodaboda)에 의지해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이동했다. 캄팔라에서 버스를 타고 음발레(Mbale)-키데포-모로토(Moroto)를 거쳐 카라모자로 향하는 여정은 쉽지 않았지만, 20대의 펄펄 나는 체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회고해본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 시절 내 능력이라 믿었던 건 사실 체력이었다.

보다타고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무겁다고 내리라는 보다맨의 호통에 내려서 걸어가는 모습

 당시 시피 폴과 키데포는 머치슨 폴(Murchison Fall)이나 퀸 엘리자베스 국립공원처럼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버스가 정기적으로 다녔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문제는 키데포에서 모로토로 가는 길이었는데, 버스가 다니지 않아 길을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서 이동해야했다. 우간다살이 3년 차라는 자부심도 있었던 때라 동생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트럭을 타고 달리는 내내 속으로 여러가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수 틀리면 바로 내려칠 짱돌도 없었던 나는 트럭에 탄 사람들이 각기 다른 개개인의 조합임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인 채 흙먼지를 뒤집어 쓴 동생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자, 동생은 "니 얼굴을 좀 봐"라며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트럭 백미러를 바라 본 나는 내 얼굴을 보고 놀랐는데, 마치 덕지덕지 바른 어두운 색 파운데이션이 뭉친 것마냥 먼지로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모로토(Moroto)로 가는 길에서 찍은 사진. 마치 개척지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행렬처럼 나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트럭에 탔던 사람들은 처음엔 "칭총"이라며 수근댔지만 트럭에서 온종일 부대 낀 정(情) 때문인지 나중에는 이런 저런 재밌는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한 젊은이가 "예전에는 말레이시아가 가난했는데 지금은 쿠알라룸푸르가 엄청 멋진 도시가 되었다"고 말하자, 다른 젊은이는 "글쎄? 캄팔라는 계속 캄팔라일 거야"라고 말해 다같이 웃었다. 승객 중에 갓난 아이를 안은 젊은 어머니가 동생 곁으로 다가가 앉자 동생은 얼굴을 찌뿌렸는데, 영문을 모른 나는 동생에게 왜 그러냐며 화를 내었다. 동생은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며 짜증스럽게 내뱉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 젊은 어머니가 동생 옷에 토를 하고 모른 척했던 건데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동생이 애먼 사람에게 신경질을 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시아인들을 보고 뛰어나온 동네 아이들 그리고 트럭에서 본 석양의 모습

모로토에 도착한 건 저녁 6시 쯤이었고 시장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전기 대신 양초, 샤워기 대신 양동이에 담긴 물을 사용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깨끗한 편이라 하룻밤 머물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시장에서 사온 카사바 튀김, 계란 튀김 같은 걸 먹고 잠을 청한 후 날이 밝자 짐을 챙겨 카라모자로 향했는데, 카라모자에 내리자 여기가 우간다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있어서 놀라웠다.

우간다 음바라라(Mbarara)에서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

여성의 의상만 해도 파워숄더(?) 형태의 전통의상이 아닌 마사이족의 의상과 비슷하였다. 게다가 놀라운 점은 인도인이 없다는 것,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온 우간다인들이 카라모종(Karamojong)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껏 우간다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외형이 우간다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공용어인 루간다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들을 이방인으로 느끼게 끔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어느 친절한 냐보(Nyabo 현지 여성)를 만나 함께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충격적인 건 우리를 보는 사람마다 한 손으로는 배를 문지르고 한 손은 입에 갖다 대고 오물거리는 시늉을 했다. "배고프다"는 의미의 바디랭귀지를 인사처럼 하는 사람들을 보고 할말을 잃었다. 배가 그리 고파보이진 않았는데 다들 그러고 있으니 무섭기까지 했지만, WFP 티셔츠를 입은 아시아인 여성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이곳이 진정한 구호현장이구나 싶었다.

"이게 다 보석이라고?" 놀라워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 표정이 그대로 사진에 드러났다.

냐보는 우리를 어느 카라모종 부부에게로 데려갔고 이들이 주섬주섬 내놓는 비닐봉지를 열자 잘게 쪼개진 자주색 자갈들이 보였다. 겉면은 코팅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고 색채는 영롱해서 정말 보석이라면 이것들이 다 얼마인지 상상만 해도 놀라웠다. 그들은 깨진 유리조각 같은 것도 보여줬는데, 유리잔의 손잡이처럼 보이긴 했지만 묘하게도 표면이 매끄럽고 맑게 빛나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설사 이것들이 보석이 아니더라도 예쁘긴 하니 손해는 아니겠다 싶어서 부부가 가진 자갈들을 모두 샀다. 부부는 그 자갈들을 보석이라고 생각한 듯 그 작은 것들을 몇년에 걸쳐 몇 움큼씩 모았고, 나는 그날 보석 같은 자갈을 산 게 아니라 그 부부가 열심히 모아온 "시간"을 샀다.

카라모종 소녀들의 모습. 전통의상을 입었지만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영락없는 10대 소녀들이었다.

마을을 돌던 중 한무리의 소녀들을 만났는데, 나와 동생의 머리카락이 신기한지 자꾸만 만져보고 잡아당기며 웃었다. 카메라를 갖고 있는 우릴 보고는 검지 손가락을 위아래로 폈다 구부리는 시늉을 하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였다. 한 장 찍고 보여주고, 한 장 찍고 보여주고... 차라리 거울을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카메라에 비친 자신들의 얼굴을 보며 즐거워했다. 사진을 찍은 나는 카메라를 갖고 떠나면 끝이지만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진들을 인화하여 선물하고자 마을의 작은 가게로 갔다. 카메라의 SD 카드를 꺼내 사진 인쇄를 맡긴 후 막 인화한 촉촉한(?) 사진을 소녀들에게 주었다. 사진을 받고 기뻐하는 이들을 보는 나와 동생도 흐뭇하긴 했지만, 다른 친구들을 데려와서 또 찍어달라고 할까봐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다.


캄팔라로 돌아가기 위해 탄 버스는 끝도 없는 초원을 가로 질렀다. 보기에는 반듯한 흙길로 보였지만 돌이 너무 많았던 건지 버스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급기야는 아침에 먹은 만다지가 식도까지 올라왔다가 멈춰서 질식사할 정도였는데, 우리 옆 좌석에 앉은 할머니의 표정에서 그 힘듦을 읽을 수 있었다. 연세가 도대체 얼마쯤 되신 걸까, 잿빛이 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은 할머니는 혹여나 버스에서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우리를 도와준 냐보는 캄팔라에서 만나자며 자신의 연락처를 주었고 나도 마지못해 연락처를 주었다. 캄팔라에 돌아온 후 냐보는 수십 번을 전화했지만 나는 한번도 받지 않았다.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넌지시 말하던 그녀에게 헛된 희망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에겐 내가 냉정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만, 어려운 현실의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주기엔 내 자신의 힘듦만으로 벅찼던 시절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행정의 발전과 부패의 진화는 비례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