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장을 본 물건을 들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데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시는 어르신 한 분이 눈에 띄었다. 등에 둘러맨 바이올린 상자가 무척 무거워보였다. 곁눈질로 악기상자를 힐끔힐끔 쳐다보니 그 분도 날 쳐다본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여쭤보았다.
"혹시 이 악기 바이올린인가요 비올라인가요?'
"이거 바이올린이에요. 아직 초보단계예요."
어르신께서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하신다. 나에 대한 의심도 풀렸나보다. 음악을 하신다니 너무 대단하시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시고는 말을 이어가셨다.
"비올라를 알 정도면 음악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주머니는 내게 왜 아직 악기를 배우지 않았느냐고 물으셨다.바이올린이 한 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막상 악기를 샀다가 질려버려서 광속의 속도로 그만두면 어쩌나 싶어서 도전하지 못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요, 제가 피아노, 플루트, 클라리넷 다 건드리기만 하다가 얼마 못 배우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전력이 있어서요."
사실 이 분 앞에서 리코더 배우는 이야기는 하기 뭣해서 이건 살짝 뺐다.
"요즘엔 당근마켓에 악기 많이 나와요. 배우는 건 저기 롯데마트 문화센터가 잘 가르쳐 주던데요? 나도 퇴직하고 나서 그제서야 악기를 잡았어요"
이 분은 아주 쿨하게 대답하신다. 바이올린으로 시작해서 요즘은 클라리넷까지 배우고 계신단다.
그런데 몇 마디 말씀을 나눠보니 어째 처음 본 사이인데 대화가 엄청 익숙한 느낌이다. 가만, 퇴직하고 악기를 배우셨다고? 혹시 이 분도 교직에 계셨나 속으로만 생각했는 마침 오늘 막 인쇄를 했다고 건네주신 공연 팜플렛을 집에 와서 펴보고는 바로 웃음이 터졌다.
인쇄물에 적힌 타이틀은 '퇴직 초등 교원 음악발표회', 공연장 위치는 우리 교육청 4층 강당이다. 아이고야, 내 촉 어쩔꺼야.
솔직히 바이올린을 아직 안 배운 이유는 차고 넘쳤다. 어렸을 때 시작하지 않아서 배우는데 손이 아프면 어쩌나, 물집 잡히면 어쩌나, 편측 악기라 목디스크 오면 어쩌나. 그런데 중년을 지나 노년이 되었을 때 악기를 시작하셨다는 저 분을 보니 내가 왜 망설이고 있나 싶었다. 올 겨울엔 나도 바이올린을 시작해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