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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Jul 17. 2024

[완결] 사람 귀한 줄 몰라서(4)

K동에서 천대받고, W동에서 환영받다

  구청장 면담 신청이 잘 전달됐는지, 확인 차 Y구청 비서실에 또 전화했다. 이번엔 남자 비서가 받았는데, 그간 통화한 사람들 중 가장 공감 능력이 뛰어났다. 그가 특별히 해결책을 낸 것은 아니었으나, 내 의견을 듣고 동의했다.


슈히: K동 주민 자치회, K동장, Y구청 자치 행정과에 문의하니 주민 자치 프로그램은 주민 자치회에서만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답변받았어요. 이에 대해 구청장에게도 질문하고 싶네요. Y구민이 아닌 타 구민은 Y구에서 수강 불가한가요? 잔여석이 있는데도요?

비서(J): 듣고 보니, 억울하실 수 있는 부분이네요. 빈자리가 있으면, 타 구민이어도 수강하실 수 있게 하는 게 맞다고 보는데......

슈히: 맞아요. 억울해요!

비서(J): 주민 자치회에서 관리하는 부분이라서, 구청에서 관여해서 뭔가 지시할 수 있는 부분은 없어요. 

슈히: 한 가지 더요. 민간 업체에 위탁 준 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건진 모르겠어요.

비서(J):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재연락드릴게요.

슈히: 고맙습니다.


  시청 비서실에도 재문의했다. 다른 직원이 받았다. 이전에 통화한 직원은 부재중이었다. 계속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만 했다.


슈히: 담당자와 통화할게요.

비서(Y): 해결된 걸로 아는데, 더 필요한 게 있으실까요? 저한테 말씀하셔도 돼요. 저도 민원 처리 담당자예요.

슈히: 네. 어제 다른 담당자와 한 번 통화했는데, 연락이 없길래 오늘 제가 전화한 거예요. 제가 요청한 건 시장과의 면담이에요. 아직 해결 안 됐어요.

비서(Y): 그럼, 주민 자치 위원회의 회장님과 대화해 보시겠어요?

슈히: 그런 분이 따로 계세요?

비서(Y): 네.

슈히: 그럼, 제가 연락할 게 아니라 그분이 저한테 연락을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냐하면, 저는 직접 K동 찾아가서 동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만나서 충분히 조리 있게 설명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영 반응이 없었어요. 개선할 여지가 통 안 보이던데요.

비서(Y): 회장님한테 건의해 보세요. 연락드리라고 전할게요.

슈히: 시장 면담 요청은 잘 전달됐나요? 아니면, 아예 전달조차 안 됐나요?

비서(Y): 매일 보고할 시간은 안 돼서, 매주 월요일마다 한 주간의 보고를 드려요. 전달될 겁니다.

슈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K동 주민 자치회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슈히: 제 이름은 모르시죠?

직원: 네, 성함은 못 들었어요.

슈히: 슈히요.

직원: 자꾸 민원을 제기하신다고 하셔서요.

슈히: 네, 아무도 안 도와주시네요.

직원: 그분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웃음)

슈히: 음, 아니죠. 할 수 있는 게 아닌 게 아니라,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거죠. 지역 이기주의잖아요.

직원: 주민 자치라는 게, 주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예요.

슈히: 알아서가 안 되잖아요.

직원: 주민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회의 때 상의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그걸 못 기다리시니까 회장님과 한 번 만나시게 하려고 전화했어요.

슈히: 회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직원: OOO 회장님이요.

슈히: 지난번에 제가 갔을 땐, 그 자리엔 안 계셨던 거죠?

직원: 네, 회장님은 항상 계시는 게 아니라 업무가 있으실 때만 오시는 거니까. 회장님이 내일 오후 2시에 시간 되신다는데, 혹시 그때 만날 수 있을까요?

슈히: 음, 그땐 제가 일을 해야 돼서 안 돼요. 금요일은 시간 되거든요?

직원: 금요일엔 저희가 축제 준비를 해야 돼서요.

슈히: 전화 면담도 가능하잖아요. 꼭 얼굴을 볼 필요는 없어요.

직원: 네.

슈히: K동까지 가려면, 제 시간과 돈과 체력이 필요하잖아요. 아무래도, 통화가 편리하죠.

직원: 그럼, 이 번호로 연락드리라고 회장님께 전할게요.

슈히: 고맙습니다.


  다른 기관에서 함께 발레를 배우는 회원에게 말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 회원, 다 아줌마들이지?"

  "네. 30대는 저 혼자요. 40대도 드물고, 대부분 50대 이상이신 것 같아요. 백발 할머니들도 계세요. 그분들은 몸이 불편하셔서, 수업 내용을 잘 따라가지도 못하세요."

  "어차피 슈히 씨가 막내일 텐데, 기회를 좀 주지...... 이기적이네!"

  "그러게요. 제가 그분들한텐 조카나 자녀 뻘인데, 정말 너무하죠? 본인들만 혜택을 장악하잖아요. 타 구민이라고 차별하면서, 배움의 기회를 뺏는 거잖아요. 제가 사는 구의 수업도 알아봤는데, 거리도 너무 멀고 요일과 시간도 전혀 안 맞더라고요. K동이 가까워서, 다니기엔 가장 좋은데......"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K동 주민자치회의 회장이라고 했다.


회장: Y구에 13개 동이 있는데, 각자 주민들이 원하는 수업을 진행하는 철학이 있어요. 그리고, Y구민만 수강 자격이 있어요.

슈히: 제가 지금 발레 수업 들으러 왔거든요. 들어가 봐야 돼서, 용건만 간단히 말해 주세요.

회장: Y구민도 K동에서 주민 자치 프로그램을 2개까지만 들을 수 있어요.

슈히: 그건 저랑 무관해요. 요점만 말하세요.

회장: 타 구민은 수강 불가합니다.

슈히: 네, 수고하세요.


  마지막으로, 구청 남자 비서와 통화했다.


슈히: K동장은 권한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권한은 없지만, 의논해 보겠다.'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동장 외에 다른 관계자들이 더 있었는데, 동장이 말할 기회를 싹 뺏어 버리더라고요.

비서(J): 아......

슈히: 동장은 허수아비가 아닐 텐데, 왜 말을 안 할까? 제가 아는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동장은 주민 눈치를 보는 위치라서, 말을 하고 싶어도 발언권이 없다고 하네요. 그럼, 상급자를 찾아야겠다 싶어서 구청과 시청에 전화한 거예요. 근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고요.

비서(J): 이건, 구청과 시청에서 권한이 없는 게 맞긴 해요.

슈히: 아니, 민간 업체에 일을 맡긴 기관이 구청 아니에요?

비서(J): 그쪽에서 다수결의 의사를 통해 결정하는 거지, 저희 쪽에서 직권을 쓸 순 없어요. 선생님의 건의사항을 K동에 전달하긴 했어요.

슈히: 왜 이걸 비서실에서 연결해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비서(J): 그렇죠.

슈히: 구청장의 의견을 듣고 싶네요.

비서(J): 기관마다 기준이 다 달라요.

슈히: 지금 저한테 전화 주신 선생님이 제일 공감 능력이 뛰어나시고, 다른 공무원들은 일절 '저희는 개입할 수 없어요.' 다 이런 식이에요. 전 납득이 안 가요. 구청장한테도 질문하고 싶어요. 직원들 태도가 왜 다 이런 건지...... 제가 민원인이잖아요. '아이고, 저런! 억울하셨겠어요.' 이 한 마디면 되는데. 이 말을 아까 해주셨죠? 유일한 분이에요.

비서(J): (웃음)


  그는 실낱 같은 한가닥 희망이었으나, 구청장과의 접견은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구청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져 각 구에서 어떤 수업을 진행하는지 검색했다. K동에서 듣고자 했던 수업은 다행히 W동에서 현재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W동도 역시 Y구였다. 받아줄까 걱정스러웠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당장 담당자에게 전화했다.


  직원: 안녕하세요. W동 행정 복지 센터입니다.

  슈히: OOOO 수업 문의하고 싶은데, 수강생 현재 몇 명인가요? 정원이 다 찼나요?

  직원: 정원은 30명이고, 현재 25명 수강 중이요. 5명 비어요.

  슈히: 수강 가능할까요? 수업 듣고 싶어요.

  직원: 지금은 수강 신청 기간이 아니지만, 인원 미달이니 가능하긴 해요.

  슈히: 오! 그럼, 혹시 타 구민도 가능할까요?

  직원: 원칙상으론 Y구민만 가능하긴 한데, Y구 재직자도 가능해요.

  슈히: 와! 그럼 저 가능하겠네요. 고맙습니다!


  W동은 집에서 편도 약 10km,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버스를 두 번 타야 했다. 번거로웠다. W동으로 수업을 들으러 다니려면 앞으로 고생하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타 구민도 수강 가능하다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강의실은 W동 주민 센터 3층의 대강당이었다. K동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쾌적했다. 그런데, 정작 나가보니 15명 남짓이었다.

  "25명 등록했다고 들었는데, 출석률이 이것뿐이에요?"

총무에게 묻자,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비밀스럽게 설명했다.

  "회원 간의 갈등으로 인해서, 다수의 회원이 싹 빠져나갔어요. 한 차례 물갈이가 됐지."

  "아,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군요......"

  "자리 싸움했거든. 그 후로 우린 번호표를 뽑아서, 자리를 정해요. 지정석을 그대로 지켜야 돼요."

  "네? 그냥 일찍 온 사람이 서고 싶은 곳을 아무데나 쓰면 되는 거 아니에요? 고정석이 있는 곳은 또 처음이네요......"

  "어머, 신입이에요? 반가워요, 환영해요! 앞으로 수업 열심히 나오세요!"

  W동에서 격렬히 환영받았다. 만나는 회원들마다 눈을 맞추고 웃으며, 반겼다. K동에선 구박받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는데, W동에선 하루아침 사이에 환대를 받았다. 감격에 겨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K동 보다 W동 회원들이 훨씬 미인이었다. 회원들의 평균 연령대도 비교적 젊고, 수업 옷차림도 다양하고 예쁘게 차려입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 W동에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그건 아무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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