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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 May 16. 2021

목소리의 형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사람을 상상했다.

 우리 엄마는 유치원 선생님이다. 그래서 그런지 목소리가 남들보다 큰 편이다. 아무래도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 자연스레 목소리가 커진거 같다. 엄마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커진 목소리는 지금의 우리 엄마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우리 언니는 흥이 많다. 가끔 보면 참 대리 민망해질 정도로 성격이 밝고 명랑한 편인데 목소리 역시 그런 언니와 비슷하다. 가늘고 높은 음의 목소리. 남들이 듣기엔 나와 언니의 목소리가 똑같다며 서로 구분해내지 못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다. 뭐 이건 딴 소리고. 생각해보면 목소리는 목소리 주인의 모습을 여러 가지 형태로 닮아있는 거 같다. 직업이라던지, 성격이라던지 하는 것들. 그래서 나는 요새 목소리로 그 사람을 상상하곤 한다. 


 누군가가 말하는걸 하나도 빠짐없이 들은 적이 있는지.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의 것을. 얼굴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고 심지어 이름조차 모른다. 나는 요새 그런 짓을 많이 하고 있다. 잠깐 tmi(too much information.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정보.)이지만 나는 국가 근로생이다. 요즘 하는 일은 회의 녹취록을 푸는 일이다. 회의 내용을 녹음해서, 기록 용으로 문서화 작업을 하는 일이다. 꽤나 단순한 작업이지만 2시간짜리 회의록을 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 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인, 의미 없는 <어, 그런데, 있잖아요, 그러니까> 같은 것들도 놓치지 않기 위해 몇 번씩 반복해서 듣곤 한다. 그렇게 몇 번의 회의 내용을 기록하다 보니 참 이상하게 이 사람의 말투와 억양,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꽤나 잘 어울린다.


 목소리는 그 사람의 나이 때도 잘 설명해준다. 내가 듣고 있는 회의는 북 토크인데,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있어 그 차이를 듣기에 아주 좋다.  보통 20대의 목소리는 무겁지만 가볍다.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이게 제일 적절하다. 뭔가 힘이 있지만 어딘가 한없이 가벼운 부분이 꼭 하나씩 존재한다. 무거운 단어들이 모여서 문장을 만들어내지만 꼭 하나씩 포함되어 있는 그 가벼운 부분. 근데 그래서 좋다. 가끔씩 그런 학생이 귀여운 듯 웃는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합쳐지면 나도 함께 웃고 싶어 진다.  40대의 목소리는 단단하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렇게 느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래 그랬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하지만 이런 부분은 너의 말에 공감해. 우린 서로 다르지만 존중해. 같은 것들. 그래서 멋있다. 나도 빨리 저렇게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했다. 많은 아픔과 슬픔, 기쁨과 상처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나오는 모든 것들. 마지막으론 60대의 목소리다. 조금은 웅얼웅얼하면서도 어딘가 꽉 차있는 목소리. 꼭 말투에 하나씩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습관들이 있다. 예를 들면 <근데 말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같은 것들. 그런데 보통 꼭 다른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보통 자신의 경험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듣고 있다 보면 이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았구나 싶어 지다가 참 tmi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 내가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몇 분 계신다. 한 분은 40대 여성 분인거같은데 참 멋있으시다. 반대 의견을 기분 나쁘지 않게 얘기하실 수 있고 목소리에 힘이 있어 그분이 등장하시면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집중하게 된다. 참 웃기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 데다가 심지어 내가 듣고 있는 걸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분은 왠지 꼭 어딘가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거나 무언가를 가르치는 분일 거 같다. 셔츠류의 옷과 청바지, 걷기 편한 단화를 주로 좋아하실 거 같다. 또 다른 한분은 60대 할아버지이신데 이분은 체크무늬 셔츠를 좋아하실 거 같다. 금테 안경을 쓰시고 머리는 희끗한. 이분은 참 점잖으시다. 주로 말을 잘 안 하시는 편인데 어쩌다 말을 하실 땐 당신이 생각하던 것들이 여러분의 말을 듣고 나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같은 것들을 말씀하신다. 참 다정한 분일 거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사람을 상상하는 일이란 꽤나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이내 이런 나도 참 어딘가 변태스러운 부분이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상상을 그만 두곤 한다. 요즘의 나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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