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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주 Mar 24. 2024

가슴을 뜨겁게

살아있는 아르헨티나 젊은이들

수십 년 전에 한국을 처음으로 떠나 밟은 외국땅이 노르웨이의 오슬로였다. 그때는 대한적십자사의 대표로 참여한 미팅이어서 노르웨이 적십자사의 극진한 대접으로 그들이 미리 마련한 방문지를 따라다니느라 그 나라의 전반적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일주일간의 적십자사 컨퍼런스를 마치고 나는 혼자 기차를 타고 꿈에 그리던 독일로 향했다. 하루를 넘게 걸려 도착한 그 당시의 수도였던 본(Bonn)에 도착을 하자 딱딱하고 강한 독일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던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한국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며 배웠던 독일어가 귀에 들어왔다. 드디어 그 독일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후 본과 프랑크푸르트, 아헨등 독일의 도시를 다시며 가장 가까이 느껴졌던 것은 빈 성당들이었다. 노후되긴 했어도 들어가려고 연 문에서부터 과거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으나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노파들의 기도하는 모습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들이 큰 성당의 차가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물거리는 모습이 텅텅 비어 가는 교회들을 방문하며 마치 죽어있는 사회를 느꼈었다. 


80년대 한국은 기독교가 한참 뜨겁게 부흥하던 시기였다. 나는 소속된 교회가 있었지만 토요일에는 "예수 전도단"이라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기독교를 뜨겁게 기도와 찬양으로 리드하던 구릅의 기도 모임에를 참석했었다. 우리는 가슴이 다 뜨거웠었고 여름이 되면 지방으로 봉사활동을 가서 성경말씀을 나누고 기도로 봉사를 하였다. 봉사활동 중에 내가 가장 잘하고 즐거워했던 일은 우연하게도 남의 집에 가서 아궁이에 불을 피워주는 일이었다. 나는 불 피우는 일을 너무너무 좋아했고 어느 누구보다도 불을 잘 지폈고 지속시킬 수 있었다. 그 타오르는 불빛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고 가운데의 붉은 불꽃과 가장자리의 푸른 불꽃이 춤추듯이 강렬하게 자기 몸을 불태우는 짚푸라지 섶과 어우러져 서로 역할이 바뀌는 모습은 경의롭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 불꽃을 통해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열정으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피의 흐름을 보는 것까지 가능해졌었다고 믿는다. 나는 늘 뜨거운 마음으로 살고 싶고 마음이 뜨거운 만큼 내 머릿속에서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렸고 느리게만 느껴지는 내 발걸음이 늘 아쉽게 생각이 될 정도로 행복했다. 


미네소타에서 교회를 찾아갈 때는 찬양이 좋고 말씀이 좋아 주일에 예배를 몇 번씩이나 드리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지냈던 교회의 뜨겁던 믿음의 활동이나 친교를 늘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도 찾아간 "Grace Church"라는 교회는 마치 한국에서 경험했던 교회와 가장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주일예배를 모두 모여 같이 드리고 주일 저녁에는 가족들과 모여 좀 색다른 예배를 드렸다. 간증을 하는 시간에 스포츠 스타와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신앙고백을 하기도 했고 기독교 신앙을 주제로 한 마술사가 초빙되어 마술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 하는 퍼포먼스를 보기도 했다. 수요일 저녁에는 온 가족이 교회로 와서 엄마는 성가대로 아빠는 성경공부로 아이들은 어와나(AWANA)라는 어린이 성경활동 프로그램으로 각각 나누어 자신들의 활동을 하고 그것이 끝나면 온 가족들의 모여 아빠 장로님들이 손수 마련한 저녁식사에 교회전체가 참여하는 행복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 교회는 마치 전 교인이 교회를 중심으로 함께 사는 느낌을 주었고 각자 학교나 회사에 일을 하러 다니는 공동체와 같은 생활을 나눌 수 있게 조직되어 있었다. 


미네소타에서의 공부가 끝나고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오게 된 나는 그레이스 교회의 목사님이 다녔다며 추천한 교회를 다니면서 처음에 영적인 방황을 많이 하게 되었다. 어느 교회에도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내가 나이가 든 탓도 있겠지만 교회가 너무 이해타산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한국에서와 같은 불타는 성령의 힘이란 것을 느낄 수 없었고 교회의 설교는 심리학 교과서 같은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한인교회를 추천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어 처음으로 한인교회를 나갔다. 미국교회와 예배시간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유학생으로 시작한 나의 미국생활에 이민자를 중심으로 한 교회생활이 어떤 면에서는 "현지인"으로서의 미국교회보다 적응이 더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점점 교회에 예배시간만 나가는 수동적인 크리스천이 되어가면서 사는 것이 다 이런 것일까 하며 적응하기에 급급했었다. 같은 지역의 가정끼리 모이는 목장모임에서 다 부부와 아이들의 가족끼리 모이는 모임에 혼자 사는 나는 더욱 할 말을 잃어갔다. 그렇게 가슴이 뜨겁게 기도하고 봉사하던 나는 서서히 믿음의 죽음을 걷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밀알선교단의 목사님의 문자가 도착을 했다. 생뚱맞게 3월에 아르헨티나 밀알로 강의를 하러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생뚱맞은 이유는 목사님도 학기 중인 내가 강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학기의 가장 중간인 3월에 갈 수 있냐고 물은 것이다. 나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가겠다고 했다. 나와는 완전 반대의 남반부에 사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강의에 참석할 사람들이 누구이며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브라질, 과테말라의 특수교육과 장애인 복지에 대해 묻고 공부를 먼저 했다. 과연 어떤 내용을 전달해야 할까 고민을 하면서 강의준비를 했다. 욕심이 앞섰을까? 나는 자신 있게 한글과 스페인어를 섞어 강의파일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 캘리포니아로 와서 스페니쉬를 쓰는 학생이 50%가 넘는데 스페니쉬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적이 있기에 바로 스페니쉬 강의를 7개월 동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어와 문법이 비슷하고 영어와 어휘가 비슷하기에 말은 못 해도 보고 읽고 하는 것은 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구글과 ChatGPT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한국말을 스페니쉬로, 바뀐 스페니쉬를 한국말로... 마음에 안 들면 스페니쉬를 영어로 바꾸고 바꾼 영어를 또다시 스페니쉬로 그리고 다시 한국어로... 한 문장을 수십 번씩 언어유희를 하며 단어를 바꾸고 또 바꾸어 내가 원하는 단어들로 결국 10시간 정도의 강의를 위해 한 달이 걸려 완성을 했다. 


부에노스 아리레스 공항까지 너무도 멀었다. 특히 갈아타는 공항에서의 긴 연착이 너무도 힘들었다. 무려 집을 출발한 지 34시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 나는 그날 저녁에 미국 대학교 강의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단장님이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저녁식사와 쇼를 준비해 주셨는데 나는 처음에 사양을 했다. 그런데 장애인 체험 쇼라는 소리를 들으니 꼭 가고 싶었다 (그것은 다음에 쓸 예정!). 쇼가 끝나는 시간이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라서 학생들에게 1시간 늦게 수업을 시작하자고 문자를 쳤다. 그런데 쇼가 끝나고 길가로 나오자 1분도 지나지 않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을 수업을 취소하자는 문자를 보내고 아이들의 답을 받고 하느냐 정신이 없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전화기만 들여다보지 말고 밖을 구경하라고 한다. 아! 이런~~ 나는 한 번에 하나씩밖에 못한다. 그렇게 허무하게 학생들의 수업을 날리긴 했지만 쇼에서 경험한 내용을 상세히 나누겠다고 생각하며 나를 위로했다. 


다음날 첫 강의가 시작되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젊은 청년들이 앞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고 드문드문이지만 현지인들과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과테말라의 선교단원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아무리 전문적 강의를 한다고 해도 현지 문화와 현지인에게 필요한 내용을 전해야 하는 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과거 한국이 현재의 부유한 국가가 되려고 발돋움을 할 때 유행했던 말이 "코리언 타임"이라고 있었다. 여기에 바로 그 "아르헨티나 타임"의 느긋함이 있었다. 내 강의가 무려 1시간 반이 늦어졌다. 내 강의시간은 2시간 정도라서 다른 스케줄을 줄인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자신 있게 "아무리 늦게 시작해도 끝나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 특기입니다"라고 소개를 하고 45분 만에 강의를 마쳤다. 그리고는 바로 내 방으로 가서 다음 두 번의 강의 내용을 바꾸었다. 좀 더 동영상도 집어넣고 내 개인적인 경험의 사진들을 넣었다. 오후가 되어 두 번째 강의가 시작되고 저녁때 세 번째 강의까지를 진행하며 아르헨티나 청년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았다. 그리고 점점 뜨거워지는 그들의 찬양을 들으며 나는 어렸을 적 처음 교회에 가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과 젊어서 뜨겁게 봉사하던 때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남미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은 뜨거웠고 봉사하고 서로 아껴주는 모습이 나를 다시 살아나게 했다. 


대학생 젊은이들은 내 강의에 호응해 주었고 너무도 좋아해 주었다. 언어가 안 통하니 뭐니 뭐니 해도 "엄지 척"으로 모든 이해가 되었다. 콘퍼런스에 참석한 장애아동의 부모님들도 많은 질문을 했고 한 아버지는 자신의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얻을 수 있었다고 감격해했다. 이곳 아르헨티나 단장님이 대학생들이 나를 너무 좋아하며 함께 식사할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며 만족해하셨다. 나는 내가 강의만 잘 준비하고 나면 강의를 시작할 때 성령이 임한 듯 딴 소리를 해가며 마구 떠들어 댄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내가 개떡같이 말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란 사실을 무조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부모님들을 위한 강의를 했다. 한국에서 이국만리 타향에서 장애자녀를 키우시는 부모님들과 현지인 부모님들이 함께 했다. 역시 준비해 간 동영상의 보여주고 장애자녀가 준비되어야 하는지 부모님들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하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한 어머니는 강의하는 중간부터 눈물을 흘리시기 시작했고 많은 부모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라기보다는 위로잔치인 듯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위로보다는 할 일을 가슴 가득히 담아드린 것 같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다른 사람보다 튄다는 것은 알지만 남들은 나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편이다. 여기 단장님은 좀 쿨한 편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MBTI에서 감성(Feeling)을 중시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사고(Thinking)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봤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교수님은 좀 다른 한국사람하고 달라서" 아르헨티나 젊은이들이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다르냐고 묻자 내가 사람들에게 벽이 없이 다가서는 것이 다른 한국사람과 가장 다르다는 것이다. 맞다! 나는 여행을 해도 그곳의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도 언어가 안 통해도 그 지역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찾는다. 아르헨티나의 젊은 가슴은 뜨거웠고 멀리 혼자 떨어진 듯한 부모님들의 가슴은 감격했고 그 무엇보다 나는 다시 젊은 가슴의 나를 찾을 수 있는 여행이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나는 그들에게 구글의 힘을 빌려 내 말을 전하고 싶었다. 


"드럼소리 내 심장을 울리게 하고

 베이스 기타의 낮은 둥둥거림은 내 폐 속을 파고들고

 피아노와 기타 소리는 내 영혼을 들어 올리고

 그 위에 얹은 찬양 인도자의 토하는 듯한 찬양소리가 

 살아있는 예수를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통역을 하시던 단장님의 나와 구글의 합작 글을 읽자 대학생들은 환호했다. 우리는 서로 뜨거운 포옹으로 감사했고 서로 인스타그램의 친구가 되었으며 남미 사람들의 쓴다는 WhatApp의 절친이 되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아디오스(Adió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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