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도 원하던 선물과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
난 12월을 가장 좋아한다. 일 년 내내 기다린 12월의 하루하루는 유난히 빨리 지나는 것 같아 하루를 48시간으로 길게 늘이고 싶다. 12월의 추운 날씨는 손끝 발끝에 이르기까지 몸 전체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신체적 자아의 크기가 최대가 되고 왠지 모르게 찾아드는 외로운듯한 감정은 지나온 1년을 되짚어볼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어 좋다. 큰 기쁨을 안겨줄 기회를 기다리며 상점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풍성함이 좋고 가슴속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며 무엇으로 감사의 표현을 할까 생각해 보는 즐거움이 좋다. 또한 기억에 새겨진 내가 받았던 선물들을 되내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릴 때 4명의 오빠들과 자란 나는 항상 머슴애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들과 자란 가정환경이 나를 머슴애 같은 행동을 하게 했다.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50년대 말과 60년대에 유년기를 지낸 우리들은 오빠 언니의 옷을 내리 입던 사회적 환경도 한몫했다. 오빠들 밖에 없는 나는 여자이면서도 오빠들의 옷을 물려 입었다. 특히 어디를 가나 나를 업고 다녀준 넷째 오빠의 옷을 얻어 입곤 했다. 둘이는 개구쟁이로 동네 흙바닥을 뒹굴다 돌아오는 저녁에는 거지꼴이기 일쑤였다. 우리 거지팀은 오빠가 중학교 입시공부를 하기 시작하며 해체되었고 홀로 남은 나는 머슴애 모습에 적응해야 했다.
그 해 연말에 엄마는 나에게 어떤 선물을 줄까 하고 물으셨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해도 될지 엄마의 의도를 읽으려고 하다가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자옷”이라고 웅얼거렸다. 그 말에 엄마는 너무도 놀랐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이니 남자아이들 옷이라도 상관치 않고 내리 입혔는데 그것이 나에겐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일인 것을 아셨던 엄마는 너무도 미안해했다. 엄마는 다음날 당장 명동에 있는 맞춤 양장점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해 입혀주셨다. 물론 아들만 키워오신 엄마의 센스로 맞추어 준 그 옷은 공주 드레스가 아닌 톰보이 같은 바지와 윗도리였다. 하지만 내가 소원했던 “나만의 것”이라서 난 마냥 즐거웠다.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 선생님이 “효선이 새 옷 입었네”하고 예뻐해 주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정도로 나는 선물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해질 때까지 입었던 기억이 있다.
선물은 늘 날 가슴 설레이게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는 사실과 크고 비싼 선물보다는 정성이 담긴 선물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는 선물 중에는 40여 년 전 교사로 재직할 때 한 학생이 내가 좋아하는 사자를 수놓아준 것이 있다. 또 한 친구가 직접 야생화를 따다가 곱게 말려 하나하나 조각이음을 해 만든 예쁜 꽃 액자이다. 미국에서는 한 한국학생이 부인과 밤을 새워 대추를 곱게 자르고 잣과 꿀을 넣어 직접 만들었다는 작은 병에 들은 대추차를 받은 기억도 행복하게 한다. 또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 중에는 친구들이 직접 쓴 책인데 책을 선물로 받으면 나는 자랑스러운 친구를 가진 묘한 우쭐함에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기억에 남는 책중에는 대학선배 하종강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가 노동운동을 하며 만난 각 분야의 대표들을 인터뷰하여 “한겨레 21”에 연재하던 내용을 묶은 책이다. 수십 년을 한결같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서든 달려가 노동문제를 함께 고심하는 그는 내 마음속에 영웅의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책에 소개된 각 분야의 대표 한 분 한 분을 글 속에서 만나며 감히 난 “특수교육 순악질 여사?”로 멋모르고 인터뷰에 참여한 것이 부끄러워 그 책을 받았을 때 다른 주인공들만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했었다. 또 다른 하나는 미주 한국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정숙희의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났는가”라는 책이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선물로 건네받은 그 책은 이민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해 한국일보에 10여 년 간 연재한 내용을 모은 책인데 어쩜 그렇게 내 생각과 같은지 속을 들킨 것 같은 당황함과 답답함을 한방에 날려주는 통쾌함이 있는 책이다. 그의 글솜씨를 귀감으로 나도 나의 생각을 더 당당하게 표현해 보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그렇게 정성이 담긴 선물들은 나를 찾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선물은 크거나 가격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을 지닌 사람 간의 표현이다. 특히 자녀에게 주고 자녀에게 받는 선물을 잘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 사실 의미 있는 좋은 선물을 주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평소에 잘 알아야 한다. 자녀가 중요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며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평소에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선물을 즉시 주는 것보다는 조금 기다릴 수 있는 기간을 두었다가 의미 있는 날에 전달하는 것은 자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한 해를 마무리해 가는 세모에 내 마음을 울렸던 선물을 되짚어보며 그것을 통해 전해지는 교훈으로 2024년에 대한 마무리와 2025년을 맞이하며 새해 희망과 목표로 연결되는 강한 고리를 만들어 본다.
이 글은 2001년 12월 21일과 2007년 12월 31일 중앙일보에 게재되었던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