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live it and rejoice!
왕관을 쓴 아름다운 여인 옆으로 물고기 꼬리가 그려져 있는 로고를 사용하는 스타벅스를 지날 때마다 커피가게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이 궁금해 찾아보았다. 아! 그 여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인이었다. 커피의 여신? 아니고... 그냥 주인이 좋아해서 로고로 사용했다고 한다. 얼굴은 로고에서 처음 봤지만 그 여인의 이름인 "사이렌 (Sinens)"은 어렸을 때 봤던 오디세이라는 영화에서 굉장히 인상에 남아있다.
사이렌은 아름답지만 매혹적인 음악과 노랫소리로 지중해를 지나는 모든 배의 선원들을 유혹하여 섬의 바위 해안에 난파시키는 위험한 인물이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이 유혹하는 구간을 지날 때 깊은 호기심에 못 이겨 자신을 뺀 모든 선원에게 귀를 막게 하고 자신을 돛대에 단단히 묶고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드디어 섬을 지나갈 때 오디세우스는 마법의 노랫소리가 들리자 실성한 듯 풀어달라고 간청하지만, 부하들은 듣지 못했다. 섬을 무사히 지나간 후, 결국 그는 살아남아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영화 오디세이는 준비와 절제를 통해 유혹에 저항하는 방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나는 평소에 유혹을 느낄 때마다 사이렌이 있을 것을 알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는 오디세우스가 되곤 한다. 1988년에 개봉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The Last Tempation of Christ)"이란 영화는 개봉되기 전부터 많은 개신교도들이 상영금지를 촉구했고 개봉첫날에는 극장 앞에서 시위도 있었다. 나는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영화이길래 교회 사람들이 막는 것일까. 제목도 "유혹"인 걸 보면 예수교를 폄훼하고 믿음을 흔드는 내용이겠지만 궁금함을 못 참고 개봉첫날 시위대를 뚫고 들어갔다.
아! 많은 외설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성서적 기반을 벗어나는 내용도 많다. 예를 들어 혼쭐이 나신 예수가 십자가 처형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아 결국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을 한 후 가족을 꾸미고 평범하게 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그렇게 변한 예수님을 설득하려다가 사도 바울은 실패하고 스스로 자신만의 그리스도를 그려 전도를 시작한다. 그 영화로 인해 "그게 맞아!" 하며 믿음을 버릴 수 있을까? 나에게는 인간의 허구적(Non-fictional) 내용이고 이미 로렌스(D.H. Lawrance)의 "죽음을 경험한 남자"라는 소설과 유사한 내용이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는 이 영화에서 두 가지를 배웠다. 예수의 인간성과 신앙에 내재된 영적 갈등을 표현한 예술적 탐구라고 높이 평가한 영화 평론가와 일부 종교 학자들의 호평과 마찬가지로 나의 갈등을 비춰보았다. 나는 갈등과 약함 때문에 스스로 자책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때를 상기시켜 주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그 영화에서 비추는 예배방식이었다. 신성한 예배의 틀은 많은 시간을 지나며 지금의 예배방법으로 만들어졌고 나도 그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나는 구약에 미리암이 소고를 들고 춤추며 여호와를 찬양하는 모습(출 15:20-21)이 그려져 있는 것과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영화에서는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러 내려가던 강가에 이미 침례를 받고 예배를 위해 모인 사람들을 영상화해 내 눈에는 "미친 듯이" 마음대로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정말 기쁠 때면 우리는 당연히 음주가무가 따른다.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이 당연한 이유이다.
언어능력이 부족한 장애인의 경우 언어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기쁨을 하나님께 표현해야 한다면 바로 노래와 춤이지 않겠는가?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특수교사로 근무를 하는 제자가 그가 관찰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자폐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교회 사역할 때나 유아부 아이들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자유롭고 순수한 무아지경의 춤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라고 했다. 왜 교회에서는 볼 수 없었을 까? 교회에서도 "가르쳐야 하는 대상" "제제당해야 하는 문제행동"으로 목표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자폐아동들이 추는 춤을 보며 신앙고백을 한다. 다윗왕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가져올 때 춤추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춤추며 기뻐하는 모습이 다윗의 신앙심과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었듯이 특수목회에서 그들의 신앙심도 그렇게 억제하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자 (삼하 6:1-23)나 복음성가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의 가사에도 "나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 시대의 선지자란 평판을 듣는 토저(A.W. Tozer, 1897~1963)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과 예배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자가 일하는 콜로라도는 혹독한 겨울 동안에는 학생들이 야외놀이 시간을 갖지 못하고 실내에서 놀아야 한다. 많은 자폐아동들은 수업시간과 노는 시간이 나누어져 있는 스케줄에서 벗어나게 되고 실내에서만 하루 종일 지내면 에너지 방출이 되지 않아 평소보다 문제행동이 많아지곤 한다. 비장애 학생들은 불평을 하면서도 교실 안에서 놀라는 교사의 지침을 따르려고 노력하지만 그들도 지속적으로 실내에 갇혀있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곤 한다. 청출어람이랄까 나의 제자는 나보다 기지를 내어 교실에서 클럽 분위기의 댄스파티를 한다.
교실의 불을 다 끄고 빛은 오직 미러볼에서만 나온다. 버블 머신도 켜고 글로우 스틱도 흔든다. 그리고 노래방용 마이크도 쥐어준다. 그 순간이 되면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같이 춤을 추지 않고는 못 배긴다. 순딩 순딩하고 하기만 한 제자가 순전히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자신의 흑심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해 그에 대해 새로 배웠다.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댄스클럽 아이디어는 환경의 자극을 줄이고 미러볼에서 나오는 강한 자극으로 그들의 감각적 요구를 채워주어 집중할 수 있고 에너지도 충분히 발산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그의 학교에서는 아주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시간표에 따라 아이들이 움직이게 계획되어 있고 교사의 말을 들을 때마다 사탕으로 보상을 주는 아주 해괴한 교육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장애아동의 행동특성에 맞는 특수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지만 결국은 아동들의 행동을 "통제"하여 교사가 편안해지고 학교의 책임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는 어른을 위한 체계인 것이다. 그런 바리세이파처럼 틀에 맞춘 교육만을 고사하던 학교가 나의 제자의 댄스클럽 오픈을 허락한 것이다.
특수목회는 어때야 할까? 장애인들이 찬양 멜로디에 영과 혼과 육을 온전히 맡기어 온 힘을 다해 춤을 출 수 있고, 그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에 찬양팀의 소리가 묻히더라도, 병정처럼 서있는 사람들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뛰어다닐지라도, 우리가 계획한 행동만을 요구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며 같이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며 온 힘을 다해 춤을 출 기회를 만들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는 자폐아이들이 기쁨을 느낄 때, 그 감정을 숨기거나 억제하지 않고, 몸 전체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다윗의 순수함과 닮았다고 말한다. 제자, 파이팅!!
우리는 교황님같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지도자의 말과 행동은 큰 변화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본보기를 배워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eVttm4x6i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