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를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병
어렸을 때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별명에 꼭 들어맞을 정도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소심했다. 엄마는 "쟤는 뭔 말만 하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 말을 걸 수가 없어"라고 토로했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네" 아니면 "몰라요"중에 하나였다. "몰라요"는 나의 소극적인 "No"였다. 병치레로 5살이 넘어서야 만난 가족이 낯설기도 했고 막내인 나는 의사표현의 기회도 없었다. 그래도 막내오빠가 동네에서 딱지치기며 구슬치기를 할 때면 들고 나는 딱지와 구슬의 숫자를 세는 매니저가 되었고 엄마가 동네 분들과 화투를 칠 때면 오가는 판돈을 귀신같이 계산해 내는 일등 비서였다. 그렇게 나는 내가 누군가의 일을 도울 때만 존재감이 생기곤 했다.
눈치를 보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의 감정의 변화가 눈에 보이고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아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어렸음에도 내가 남을 이해하고 돕는 행동을 보며 생각이 깊다거나 착하다고 했다. 그런 칭찬은 나를 더 부추겼고 나는 더욱더 스스로 하는 "선한 행동"의 양에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더 착해져야 하고 더욱더 남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미리 돕겠다고 나서는 행동이 오지랖이고 남에게 잘 보이는 의도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나만 빼고 주위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교육계를 강타하고 있는 행동수정 이론이 있다. 행동주의는 인간의 학습과정을 S-R 한마디로 설명한다. 즉, 환경에서 자극(S: stimulus)을 받으면 반응(R: response)을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면 가지고 싶어 하는 견물생심(見物生心)과 비슷한 설명이다.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하는 행동이론은 인간을 너무 소극적으로 보았다. 스키너(B.F. Skinner, 1904-1990)는 행동이론을 발전시켜 사람이 먼저 다양한 행동을 하고 그중에 보상을 받은 행동은 지속하고, 보상이 없으면 중단한다고 새롭게 설명했다.
하지만 이 이론의 가장 큰 약점은 "좋은" 행동을 판단하고 보상을 주는 누군가가 나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부모나 교사가 먹을 것이나 용돈등의 보상물을 쥐고 아이들을 조정하다 보면 아이들은 보상을 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보상을 얻기 위해 남의 비위를 맞추도록 학습된다. 용돈이나 먹을 것보다 훨씬 더 통제하는데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다. 부모들은 인정을 해주고 안 해주는 방법으로 자녀들을 통제하곤 한다. 부모의 "인정"에 절박했던 어린 시절을 겪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남으로부터 인정을 갈구하게 된다.
한 사회학자는 인정받기에 목말라하는 것을 "질병"으로 보았다. 나의 가치를 남이 인정하는 정도에 의존하고 갈망하는 병이다. 브래이커(H. B. Braiker)는 "비위 맞추려는 병 (Disease to please)"이란 저서에서 이러한 행동의 증상과 치료법을 다루고 있다. 비위 맞추는 사람들의 특징은 남이 원하거나 기대하는 것을 행하려고 노력하고, 친절해 보이고 누구의 감정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전전긍긍한다. 절대로 남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내가 바쁜 와중에도 무언가를 요청하는 사람에게 절대로 "NO"라고 하지 못하는 감정과 행동패턴을 보이고 있다. 쉽게 "NO"를 "NO"라고 못한다면 당신! 아프다!
병을 진단하는 데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지만 치료방법에 있어서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특히 심리적이고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 해보라고 하는 제안들이 한국사회에서는 적용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첫 단계로 남을 비위를 맞추려는 행동과 그 원인을 적고, 두 번째 비이성적인 자신의 두려움과 맞서고, 세 번째 단호한 태도로 죄책 감 없이 말하기를 연습하라는 것인데 생각보다 혼자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미국처럼 병원을 찾아 개인이나 구릅으로 하는 상담치료 시간을 갖는 것도 대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장자의 입장에서 "NO"를 "NO"라고 못하는 병을 어떻게 치료할까 생각해 보았다. 결국 속으론 싫어도 계속 남에게 잘하는 이유는 잘 보이려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필요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픈 마음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남들이 날 찾아주고 사랑해 줄 것이란 생각에 근거한다. 장자의 "황천이야기"는 나를 나의 쓸모 있음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냥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함을 설명한다. 내가 부모강의에도 자주 사용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의 개념을 이해하면 된다.
장자는 내가 발을 딛고 서있을 수 있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조그만 땅만 남겨두고 그 주변의 넓은 땅을 황천에 이르게 될 때까지 판다고 생각하라고 한다. 파기 전에 내가 서있는 가치 있던 땅이 주변의 가치가 없는 모든 땅을 파버리고 나니 아무 가치가 없어지니 드디어 "쓸모없음"의 땅이 "쓸모 있음"이 있었음이 아니었느냐고 묻는다. 나는 우리에게 맞는 현대적인 예로 생각해 본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항생제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인류의 생명을 지켜온 페니실린은 1928년 플레밍이 포도상구균 배양실험을 하던 중 오염된 배양접시에 핀 곰팡이였다. "쓸모없는" 푸른곰팡이를 바로 버릴 수 있었겠지만 그 주변에 세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보고 푸른곰팡이의 세균성장 억제라는 "쓸모 있음"을 찾은 것이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중요한 기업체인 3M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스카치테잎이라는 접착테이프를 만드는 회사이다. 한번 붙이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 테이프를 연구하던 중 한 연구자가 화약약품 배합을 잘못해서 붙이면 오히려 쉽게 떨어지는 바람에 실패를 했다. 그런데 쉽게 메모를 적어 붙여놨다 떼어서 다른 곳에 쉽게 옮길 수 있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포스트잇이 생겼다. 포스트잇은 전 세계적인 히트상품으로 여러분도 다 알지 않는가? "쓸모없는" 실패물이라고 버렸다면 그의 진정한 "쓸모 있음"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3M 회사가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아이보리" 비누회사가 있다. 당시에 순도가 높은 비누를 만들지 못하던 때 99.4%의 순도를 자랑하는 비누제품으로 아이보리라는 단어는 비누를 대신하는 보통명사로 인식될 정도로 미국전역에 알려진 비누였다. 밤을 새워 기계를 돌려가며 비누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잘 팔리던 비누인데 어느 날 회사원이 물속에 잠겨있는 공기압축기 끄는 것을 깜박하고 퇴근하는 바람에 다음날 출근해서 보니 비누들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최악의 실수가 벌어진 것이다.
물에 뜨는 비누는 바로 신의 한 수였다. 목욕을 하다 탕에 비누를 빠트리면 미끄러워 잡기도 힘들고 거의 다 녹아버리는데 물에 떨어트려도 물에 뜨니 바로 건질 수 있는 비누는 1879년에 출시되면서 미국에 최고의 브랜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쭉 벋고 크게 성장한 나무는 가구를 만들거나 집을 지을 때 "쓸모 있어" 잘림을 당한다. 맛있는 과일과 예쁜 꽃을 피우는 "쓸모 있는" 나무는 사람들에게 모두 다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보잘것없이 비틀어진 나무는 "쓸모없음"으로 살아남아 사람들 곁에 있으며 그늘이 되어준다. 과연 이것이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을 읽으며 결국 "쓸모 있음"을 남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역설이 아닌가 의심을 한다면 당연히 다 읽지 않은 것이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그저 인간의 눈높이에서 보는 정도이다. 인간이 알아보건 말건 이미 우리는 모두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잘났고 못났고, 쓸모 있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표현하는 말이고 우리는 이미 스스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에게 인정받으려 갈망하지 말고 스스로 인류를 구하는 "푸른곰팡이"라고 생각하자. 남이 나를 알아보기 전에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