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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제로 Nov 22. 2021

일기장 다시 읽기 2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 썼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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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면도기에 베였던 손가락이 어느새 거의 다 아물었다. 


상처가 아무는 과정은 언제 봐도 새롭고 신기하다. 갈라진 살이 저절로 붙고 세포가 재생되고 다시 매끈한 피부가 된다. 살아있는 한 상처는 계속 아물어간다. 차가운 겨울 바닥을 박차고 나오는 꽃처럼, 나무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다. 몸속의 영양분이 자꾸만 새살이 돋아나게 만든다. 몸에 난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은 체계적이고 단순하다. 


그 어떤 몬스터에게 당해도 빨간 포션 하나면 해결되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마데카솔 하나로 완치되는 면도날에 베인 내 손가락처럼 병든 마음, 병든 생각들도 단순하게 치료될 수는 없는 걸까? 생각이 몸처럼 단순하지 않은 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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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을 턱 끝에 닿도록 짧게 잘랐다. 이제 뒤로 질끈 묶기는 힘들어졌지만 장점이 꽤나 많아졌다. 


우선 머리를 깜는 시간이 줄어든다. 샴푸도 조금만 짜면 충분하고 굳이 린스는 하지 않아도 머리카락 엉키는 일 없이 빗으로 잘 빗겨내려간다. 또한 옷을 입을 때 목 부분에 얼굴을 넣고 머리카락을 옷 밖으로 빼내는 과정이 생략된다. 가방 끈에 머리카락이 걸려 당겨지는 일도, 정전기 때문에 개털이 되는 일도 줄어든다. 한마디로 거추장스러움이 사라진다. 


세상에 모든 거추장스러운 마음들이 머리카락을 자르 듯 쉽게 쳐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미 식어버린 마음이랄지, 상대방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애써 붙들고 있는 애달픔이랄지 더 기다려보고 싶은 미련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람의 감정은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어서 무작정 늘어뜨려 놓을 수도, 짧게 쳐낼 수도 없게 되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짜 마음을 만들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가짜로 늘어뜨린 모습 속에 나 자신을 꽁꽁 숨겨놓고서는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인생이 무거워져만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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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내 방을 관리하는 일과 같고 씨앗을 싹 틔워 꽃을 기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냐면, 방금 전 멍하니 휴대폰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나에게는 K와 둘이서만 하는 커플 채팅어플이 있는데, K가 군대에 가있다 보니 최근에는 전혀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K와 잠깐이라도 만날 때마다 사진을 계속 업데이트해놓았더니 업데이트 히스토리에는 내 이름만 가득하게 된 것이다. 


나만 너무 얘를 좋아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스치고 지나갔다. 이내 그가 군대에 가있다는 사실을 되새겼지만 그럼에도 조금 억울한 느낌은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사진을 올리지 말고 이 어플을 이용하지 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자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싫었다. 그렇게 하나씩 안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우리의 예뻤던 추억들은 먼지가 쌓여 구석탱이로 방치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는 새 어지럽혀져 있는 내 방처럼 말이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늘 쓸고 닦고 정리해야 하는 방처럼 추억도 계속 꺼내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쳐져서 찾을 수도 없게 될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끊임없이 관심을 줘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 잘 자랄 것 같아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식물들처럼 말이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햇볕을 쐬어준 건 아니지만 꽃들이 예쁘게 피어나면 꼭 소곤소곤 전해주고 싶다. 내가 흙도 갈아주고, 물도 제 때 뿌려줬다고. 그래서 이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났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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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너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한다. 나에게 매일 수 통의 전화를 하는 너에 대해서. 


오늘도 너에게 난 시답잖은 화를 냈는데 너는 왜 먼저 사과한 걸까? 원래 먼저 사과하는 성격도 아니었는데. 


자존감이 낮은 나는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 감히 나 같은걸 왜?, 나는 사실 별로인 사람인데 실망하게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축되곤 한다. 


그런 나에게 사랑을 말해주고 다정하게 굴어줄 때에는 사실 엄청난 감동이 밀려온다. 티는 내지 않지만.

특히 가장 놀라운 일은 네가 너의 자존심을 깎아가며 너에게서 나를 지켜낼 때이다. 너의 생각을 바꾸고 나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걸 나에게 해준다는 것. 내가 주는 것보다 더 주려는 마음. 내가 소중하다는 너의 표현. 나는 그 모든 것이 경이롭고 감사하다. 


네가 날 사랑한다는 사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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