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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린 Apr 10. 2024

Lily

2021-05-08

대학 졸업 요건에 포함돼 있어, 듣지 않으면 안 됐던 '영어회화' 과목의 첫 시간에 원어민 교수님께서는 

자기소개 카드를 작성하라고 했다.

거창하게 말해 자기소개 카드지 실은 A4용지 한 장을 반으로 잘라 나눠주곤 거기에 본인의 한글과 영어 이름 두 개를 적어 제출하는 게 다였다.

그 때까지의 나는 영어 이름이랄 게 따로 없었고, 다만 국제법무학 수업에서 외국인 교수님들에게 'Rin'으로 불리기는 했었다. 내 이름에는 이중모음이 들어 있어서 발음하기가 꽤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영어 이름이라면 이름이었다.


슬쩍 옆에 앉은 친구들의 카드를 훔쳐 본다.

왼쪽 친구의 이름은 '도노반'

걔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 선수랬나 농구 선수랬나 하여튼 그렇다고 했다.

오른쪽 친구의 이름은 '소피아'

한글 이름이 '지혜'라서 그렇게 지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걸려선 안 되는 일이었기에 한참 동안이나 그 칸을 비워두고 고민하는 내게 교수님께선 그냥 아무거나 적어도 좋다며 재촉에 가까운 위로를 했다.


또 몇 분이 지나고, 이제 앞으로 제출하라는 교수님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성실하게 카드를 앞으로 전달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빠르게 내 앞까지 도착했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일단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적자, 하고 펜 뚜껑을 열어

'Lily'

라고 써서는 일찌감치 뒤돌아 있는 앞자리 학생의 손에 쥐어주었다.


릴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드 캐릭터 중 한 명의 이름이었다.

그 드라마에는 여성 캐릭터가 두 명 등장하는데, 그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달랐다.

릴리는 야무졌고 리더십이 있었으며 똑똑했고 때때로 정의롭기까지 했다.

10년 넘게 옆자리를 지켜주는 마샬이라는 인생의 동반자가 이미 있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분쟁이나 상담거리가 생기면 어김없이 전화를 받아 판결을 내리는, 성정이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데다가 예술에까지 조예가 깊은 캐릭터였다.

그에 비해 로빈은 좀.. 불안정하다.

로빈은 하키를 사랑하는 스포티한 성격이었고, 그래서 스포츠 방송국의 앵커로 일하고 있다.

남자친구가 세 달에 두 번씩 바뀌고 술을 아주 좋아하며 결정적으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로빈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그녀의 아버지는

아들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로빈에 더 감정이입을 했었다.

내가 릴리처럼 '아담하고 귀여우며 모두에게 사랑받는 스윗한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에 오면 와인잔에 와인을 가득 털어 놓고 하키 게임을 트는 그녀를 보면 어쩐지

퇴근하자마자 맥주 한 캔을 테이블에 올려두곤 야구 경기를 시청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서적으로 좀 불안한 것도, 그래서 연인을 만나도 결코 오래 연애하지 못했던 것도.

심지어는 결코 수명이 길지 못할 직업을 꿈꾸던 것까지도.

로빈이라는 캐릭터에는 나의 못마땅한 점이 모두 녹아 있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이름을 릴리라고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비틀거리는 순간마다 옆을 지켜주는 소울메이트가 있는,

늘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이름. 릴리.


내게도 이런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 중에 한 명이 그 크루의 '바니'를 많이 닮아서, 우리끼리 술을 마시며 종종 그런 농담을 했다.

우리는 하우멧 패밀리라고.

비오는 날 신당동 곱창 골목에 모여 우리끼리만 웃긴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함께 있었고,

무더운 주말 봉사활동에도 별다른 불만 없이 같이 있었다.

생일에도 잊지 않고 대학로에 모여 상징과도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언젠가부터 살아가는 게 바빠 친구들을 놓치고 산다.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종종 모이는 것 같은데 나는 좀처럼 거기에 낄 수가 없다.

서로의 상황이 달라져서도 있고 무엇보다 그 친구들에게 있는 안정감이 그때의 내게는 없었기에 못난 자존심이 그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경기도의 작은 방송국에서 일하던 시절.

상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금요일 저녁 버스에서 나는 친구들의 SNS를 몰래 훔쳐보고는 또 혼자서 상처받고 초라해졌었다.

친구들은 여전히 공덕에 모여 족발에 소주를 마시고, 대학로에서 파전에 술을 마시고, 무릎을 모으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서울에 가까워졌는데 그 자리에서는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미드 How I met Your Mother의 마지막 편에서

크루 중 한명은 점점 안정적으로 변하는 친구들의 삶과, 여전히 불안정한 자신과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기어코 크루를 떠나게 된다. 


그마저도 너무 우스울 만큼 서글펐다.

크루에게 문을 닫고 가장 먼저 떠난 사람은

로빈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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