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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린 Aug 02. 2021

채사장 <열 한 계단>

불편한 책을 읽으라는 말의 의미




1. 내가 책을 고르는 방법


나는 언제나 계절과 시사가 들려주는 대로 책을 골랐다.

봄에는 햇볕과 어울리는 기욤 뮈소의 간지러운 소설들을 읽었고, 김소월 시인의 일생이 담긴 책을 옆구리에 끼고 교정을 걸으며 음보에 맞춰 걸음을 걸었다. 나보기가/역겨워/가실 때에는.

9월이 오면 청승맞은 마음이 둘 데 없이 일렁이곤 했는데 그러면 싱숭생숭한 마음을 데리고 인천대공원 메밀밭에 가서 한참이나 책을 읽다가 돌아왔다. 그 때 가져간 책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인천 여행을 가서는 차이나 타운의 어느 간판 없는 카페에 앉아 <중국인 거리>를 읽었고, 모항 여행길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집을 가방에 챙겨갔다.

그러면 큰 돈 들이지 않고도 행복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으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께서 서거한 해에는 그의 일생에 대한 책을 읽었다. 거기서 호기심이 증폭되면 그의 임기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건을 찾아 읽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다니던 학교는 그의 상도동에 있었으므로 20년의 시차를 두고 그가 걸었던 길을 만분의 일이나마 짐작하며 걸어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불편할 것이 없는 독서였다.

내 호기심에 해답을 주는 책은 언제나 있었고 그 책을 읽으면 반드시 다른 호기심이 생겨났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는 사이 나의 세계는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공고한 성역이 되었다 . 무너진 적이 없으니 지평을 넓힐 수도 없었다. 그저 쌓였을 것이다. 나의 세계엔 상식은 쌓였을지 몰라도 “왜?”라는 질문을 통해 부정당해 본 경험은 없었다.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채사장의 글이 내 양심을 콕콕 찔렀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책을 읽으세요.'

조만간 성경을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본문에는 저자가 대학생 시절 떠난 무전여행 일화를 소개하는 부분이 있었다.

요약하면 니체의 '영혼 회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 일종의 깨달음 여행이었다는 것인데.. 이상하게 전혀 상관없는 내용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저자가 절과 교회를 전전하며 재워달라고 부탁하는 부분이었다.

그의 여행은 무전여행이었으므로 해가 떨어지면 언제나 하루 묵을 곳이 필요했다. 그는 동해의 절과 교회를 찾아가 무작정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대부분의 목사와 스님이 거절을 했는데 그러면 개의치 않고 다른 데를 찾아가 또 같은 부탁을 했다.

"무전여행 중인 학생입니다. 오늘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나는 그게 부러웠다.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거절당하면 뭐 어때? 다른 데를 가지 뭐, 어디 하나는 받아주겠지.'

그는 거침없이 문을 두드린다.

애초에 무전여행을 떠날 용기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대문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뒤돌아 다른 문을 찾아나갔던 거겠지. 아마 그는 무너져도 금방 일어서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거리를 찾아낼 것이고, 나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부러웠다.







3. 낭만적인 사람들


나는 과학이나 해양 다큐멘터리를 아주 좋아하는데 가끔씩 이상한 데에서 인류애(?)를 느끼곤 한다.

과학자들의 표정이다.

때때로 아주 낭만적인 과학자들이 있는 것 같다. 몇년 전 <코스모스>를 읽을 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책이 내 인생 최고의 책이었던 이유는 내용의 광막함과 신비함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문체때문이기도 했다. 칼 세이건은 우주를 단순히 학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랑하는 존재를 조망하듯 서술한다. 요즘말로 하면 '꿀바른 눈'으로.


채사장은 본문에서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찰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차용해 적었다.

괜히 이 말을 소리내 읽어본다. 광활한 우주의 우리는 먼지만큼도 되지 않는 존재지만 관찰자로서 이만큼 존재해왔다. 어쩌면 우주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대단함을 알아줄 인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00년도 채 못 사는 하찮은 인류가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우주가 대단하다는 걸 알아주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썩 로맨틱하다.

감정이 없다고, 그저 이성적이라고 놀림받는 과학자들은 사실 누구보다 낭만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명왕성 탐사를 위해 '뉴 호라이즌' 탐사선이 우주로 발사됐다.

발사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당하는 바람에 다소 침통한 여정이 됐겠지만, 그래도 9년 7개월의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멀리 뻗어나갔다. 그를 기다리는 명왕성을 향해서.

이 탐사선은 조금 특별했다. '우주선 나사 하나의 무게도 일일이 계산해서 나사'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철저한 나사(NASA)에서 이례적으로 탐사선에 무언가를 함께 실은 것이다.

바로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와 동전 한 닢이었다.

명왕성의 영어 이름은 플루토, 지하 세계를 관장하는 하데스의 영어식 표현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망자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갈 때 저승의 뱃사공 '카론'의 배를 타고 '스틱스'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러려면 품삯으로 동전 한 닢을 내야 한다고 적혀있다.

나사는 명왕성을 발견한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 일부와 그의 품삯 동전 한 닢을 탐사선에 함께 실었다. 평생을 명왕성 연구에 투신한 그를 명왕성의 세계로 보내주는 것이기도 했고, 인류가 창조한 세계관에 동조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낭만적이다.

뉴 호라이즌 호는 '카론'을 비롯하여 '케로베로스', '스틱스' 등 명왕성의 위성 성분 분석표와 함께, 역사상 가장 깨끗한 화질의 명왕성 사진을 보내왔다.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

한평생을 우주의 비밀을 한꺼풀 벗겨내는 데 헌신했으면서도 얼굴엔 권태로운 주름이 한 줄도 없는 노신사나, 돌고래 이야기를 하면서 씩 웃는 표정이 돌고래의 얼굴과 너무 닮은 해양 과학자의 행복한 얼굴을 볼 때.

너무 사랑하는 어떤 것을 찾은 사람은 결국 그것을 닮아가는구나

부러움을 넘어 경이로움까지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영원히 설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나 소녀 같은 마음,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말할 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낡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나를 떨리게 하는 모든 것들에 권태롭지 않게 평생을 늙어간다면 참 좋겠다.







4. 남자는 남자만을 사랑한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남자가 사랑하는 건 남자 뿐이다.'라는 글

그렇다고 모든 남자들이 동성애자라는 말은 아니고, 남자들이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싶고 자신의 세계와 철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하는 것은 같은 남성으로 한정되고, 여성은 그저 성애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엔 '너무 남녀분란을 조장하는 글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흘려 읽었는데 안병장에 관한 챕터를 읽고 나서 문득 그 글을 다시금 읽어보고 싶어졌다.(지워졌는지 이제는 찾을 수 없었지만)

나는 (어떤 면에서는) 저자가 안병장을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이야기 나눌 시간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누군가와 마주치기 위해 근무 시간을 조정하고, 그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내가 아는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 누군가가 했던 말이나 그와 나눈 대화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그가 주목받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

그건 사랑이다.

저자는 안병장을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적었지만, 이상적인 인간 안병장을 사랑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왜 인문학이나 철학에 관한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에는 남자 넷(혹은 셋)이서 하는 포맷이 많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개중에는 지대넓얕이나 알쓸신잡 마지막 시즌처럼 여자 한 명이 포함된 것도 있었지만 대개가 구색맞추기에 불과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동료라기 보다는 그저 팀에서 '여성'의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병장 이야기를 읽으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남자들은 여성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다.

서로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각자의 철학을 교감하는 것은 오로지 남자들끼리만 하고 싶어한다. 남자들에게 있어 동경과 존경, 우상의 대상은 언제나 같은 남자로 한정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여성은 남자를 너무 지나치게 사랑했고, 남자는 여성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







5. Gracias a la vita


일부러 이 노래를 틀어놓고 읽었다. 저자의 사고 장면이 느린 그림처럼 읽혔다.

눈물이 났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라면 우는 거 말고 뭘 할 수 있었을까. 갑자기 가슴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소사의 인생을 읽고 나니 그의 목소리가 더 처연하게 들렸고, 그 목소리에 위로 받았다던 채사장의 문체를 보니 담담한 말투에서 어떤 슬픔이나 분노를 이겨낸 사람의 초월적인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 책으로 위로를 받는다.
인생이란 신기해서 상처받은 사람이 다른 상처받을 사람을 위로하고 또 그가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전달하면서 굴러가는 것 같다.







6. 자존감


나는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빙빙 돌려 다른 말로 표현하곤 했다.

'건강한 자아'라든지 '자신의 부족함에 개의치 않는 인성' 이라든지. 요약하면 자존감이 될 말인데 구태여 길게 늘여 쓰는 것이다. 나의 20대는 끝없이 자존감이라는 단어와 싸워온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 세 글자를 보면 어쩐지 오랜 적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이 책의 감상도 길게 풀어서 쓴다.

왠지 마음 한 켠이 뜨끈해지는 글이었다고.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쓰는지 알아? 왜 구구절절 저 먼 고대 인도의 철학 경전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아니? 그건 네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너라는 우주의 주인공은 너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단다.'


요새 내가 가장 고민하던 주제였다. '인생의 주인공'

사람들이 자꾸 결혼식에 집착하는 것도 좀처럼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본 경험이 없으니까 그러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인생의 주인공, 이렇게 활자로만 접할 수 있는 무엇보다 추상적인 단어.. 아무래도 나는 이 주제에 관해서 더 많이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요즘의 내 생각을 아주 빼앗은 주제가 이렇게 책으로서 나타나 준 게 자못 신기했다.

가끔 이렇게 내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채는 책을 찾을 때면, 내가 이걸 읽으려고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


외모 콤플렉스에 빠져 20대 내내를 낭비했던 내가 이 말을 조금 더 빨리 들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위로를 인생의 빠른 시기에 들었다면 나는 폭풍 같은 20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까? 더 빨리 마음이 잠잠해졌을까?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7.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의 의미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계단 오르는 일과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뭔가를 깨닫거나 불편함을 느껴 그걸 해결하고 나면 일종의 계단 한 칸을 올랐다고 느낄 때가 있다.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 칸에 멈춰있겠지만 계속 불편한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러니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책을 읽으라는 말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라는 것이다.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곧 모험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불편한 책을 읽음으로써 모험을 떠나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위험을 감내하기 마련이니까.


책을 다 읽고 나에게 한 가지 당부를 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세계로 거침없이 모험을 떠나기를. 그래서 수없이 많은 대문 앞에서 좌절을 당해도 뒤돌아 다른 모험 거리를 찾아 떠날 수 있기를.

그리고 행복하면 멈추고, 행복하지 않다면 계속 계단을 오를 것!






:: 책갈피 ::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 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p.102)



니체는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서구의 문화를 병들게 했다고 진단한다. (p.104)

 

인류 역사는 보통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한다.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진리'에 대한 관점이다.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세계관을 공유했는지가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p.139)

잘 읽히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되었거나, 반대로 그 책이 나를 설득할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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