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복치 Oct 20. 2022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용기, <안경>

오기가미 나오코 월드에 초대합니다

*이 글은 독립 음악 매거진 프로젝트 gem의 <행다의 엔딩크레딧> 코너를 발췌한 글입니다.

*곡 명(하이퍼링크)을 클릭하시면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어볼 수 있어요.


나는 하찮고 무해한 유머를 좋아한다. 스스로가 ‘노잼’이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 말을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기에 억울해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력히 주장하지만 쓸데없이 웃긴 것들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졌을 뿐이다. 오기가미 나오코(荻上直子)의 영화들은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카모메식당>을 비롯해 그녀의 초반 필모그래피인 <요시노 이발관>까지 모두 쓸데없이 웃기고 따뜻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안경>을 처음 본 후에 ‘대체 이런 기괴한 유머를 여유롭게 구사하는 감독은 뭐 하는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기 시작했던 것이 <토일렛>을 제외한 필모그래피 전부를 관람하기에 이르렀다.


‘웃긴다’는 말을 반복해서 코미디 영화나 시트콤을 소개할 것이라 오해할 분들이 계실까 봐 노파심에 알려드린다. 한마디로 <안경>을 보다가 잠들면 제대로 관람한 것이다. 잠이 절실하던 때가 있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할 수 있게만 해 달라고 빌다가 동이 틀 때쯤 지쳐 잠들기를 반년 동안 반복할 때 <안경>을 만났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잠들어 보고 싶어 별의별 방법을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거짓말처럼 영화가 시작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일어나 남은 것을 이어 보며 “다 놓아버려도 괜찮다”라는 말이 어떠한 가공도 거치지 않고 마음속에 훅 들어와 자리 잡은 것을 깨달았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는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서사가 없다. 장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답하기 애매하다. 일상 드라마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기복이 없다가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유머들이 있고, 그렇지만 코미디라기엔 재미가 없다. 심지어 같은 배우들이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도 비슷한 역할로 출연한다. ‘이 무슨···. 자가복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놀랍게도 감독이 의도한 기묘한 악조건하에서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작품 사이에는 어떠한 세계관의 공유도 없지만,배우들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마치 삶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어지듯 영화와 영화를 건너뛴 느낌이다. <안경>에서는 삶에 지친 주인공 역할인 코바야시 사토미가 <카모메식당>의 식당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코바야시 사토미가 살다 지쳐 다 던지고 헬싱키로 떠나 식당을 차렸나 보군' 하며 혼자 즐거워하거나, <카모메식당>, <안경>, <요시노 이발관> 등에서 일관성 있게 속을 알 수 없는 역할로 등장하는 모타이 마사코가 반갑다거나, 감독의 모든 작품을 보고 나면 배우들이 다른 세상 사람이 아닌 알고 지내던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이를 즐기는 단계라면 오기가미 나오코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를 건네야겠다.


<안경>은 세상 속 시끄러운 것들 다 집어치우고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으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주인공 타에코가 낯선 바닷가로 떠나서도 좀처럼 마음먹은 것들을 버리지 못할 때 만난 특이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그들은 타에코의 긴장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방식으로 무너뜨린다. 일어나기 싫다고,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는 말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타에코를 억지로 깨워 메르시 체조에 반강제로 참여시키고, 어리둥절한 타에코에게 대뜸 최고의 팥빙수를 권하기도 한다. ‘나도 너만큼 힘들어 봤어’ 혹은 ‘나도 네가 어떤 기분인지 알아’ 또는 ‘네가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응원해’ 등과 같은 위로 대신 “네가 어떤 상태든 우리는 개의치 않으니 짐을 내려놓든 말든 알아서 하쇼” 하고 저마다의 여유를 즐긴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붙잡고 살아왔던 것들이, 이 바닷가 마을에서는 황당하게도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된다.


<안경>의 메르시 체조


OST 역시 단조롭고 엉뚱하다. 음악감독 카네코 타카히로(金子隆博)의 사운드트랙은 따뜻한 판타지인 <안경>에 몰입감을 더한다. 주로 피아노, 피아노와 첼로, 어쿠스틱 기타와 만돌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러 악기를 사용해 배경을 풍성하게 채우기보다 파도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풍경 소리와 같은 백색소음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단조로운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카네코 타카히로의 음악은 관객이 일상과 동떨어진 특이한 바닷가 마을에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한다. <안경>이 슬로우무비, 힐링무비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데는 음악감독의 공이 크다. 사운드가 모자랐다면 다큐멘터리가 되었을 것이고, 과했다면 새로운 종류의 스릴러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엉뚱함을 추구하는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에서, 영화의 색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공백을 메우는 음악감독이야말로 극한직업이 아닐까.


황혼의 예감(たそがれの予感)’은 영화를 대표하는 OST로, 피아노와 첼로가 두 축을 담당한다. 피아노 선율로 시작해 첼로가 더해지고, 스피카토 합주가 멜로디를 받치기 시작하는 부분은 듣는 이의 국적을 불문하고 어린 시절에 일본 바닷가 소도시의 여름을 즐기며 자랐던 것만 같은 기억을 심어준다.동양과는 거리가 먼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고즈넉한 멜로디에서 <궁>의 OST로 유명한 뮤지션 ‘두 번째 달’이 떠오르기도 한다. ‘nakki-(ナッキ-)’는 어쿠스틱 기타와 만돌린의 조합이 인상적인 곡으로, 하와이에 가본 적은 없지만 하와이의 석양을 바라보며 듣기에 좋은 노래일 듯하다. <안경> 특유의 따뜻한 색채가 어쿠스틱 기타라면, 타이밍을 예측할 수 없는 엉뚱한 요소들은 만돌린 같다.    


하루나와 유지의 만돌린(ハルナとユ-ジのマンドリン)’은 민박집 주인 유지와 하루나가 함께하는 만돌린 연주다. 바닷가에 위치한 사쿠라의 빙수 가게 앞에 걸터앉아 무심하게 연주하는 만돌린 연주를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자면, 이국적인 만돌린 소리와 파도 소리의 조화에서 휴양지의 낭만을 느낄 수 있다. 쇳소리가 섞여 다소 탁한 만돌린의 현 튕기는 소리에서 마음의 안정 역시 찾을 수 있다. 기타와 우쿨렐레가 휴양지의 낭만을 노래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면 만돌린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소리에는 갈 곳 잃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무게 또한 있다.




안경의 대표 이미지인 메르시 체조에도 동일한 제목을 가진 곡이 삽입되었다. 체조에 맞추어 곡이 만들어진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에 맞춰 우스꽝스러운 체조를 진지하게 하는 장면이 <안경>의 하이라이트다. 체조와 잘 어울리는 단순한 멜로디가 귀엽다. 리듬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체면 따위는 버리고 함께 춤을 출 수 있을 것만 같다.


타에코의 첫 빙수(タエコ, はじめてのかき氷)’는 타에코가 사쿠라의 팥빙수를 처음 맛볼 때 흐르는 음악으로, 음악감독카네코 타카히로가 직접 연주했다. 오종종하게 통통 튀는 왼손 반주가 생기를 찾은 타에코의 마음 같아 심장이 몽글몽글해진다. 피아노로 시작해 첼로로 풍성함을 더하는 곡의 전개가 마치 타에코가 스스로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바닷가 마을의 일상에 스며드는 과정을 표현하는 듯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안다. 제 한 몸 건사하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싫은 일들도 때로는 무찔러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삶이 하기 싫은 일들을 꾹 참고 버티는 나날로 가득하다면, 자유와 행복이 남의 일인 것만 같다면 잠깐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을 용기를 내보면 어떤가. 이를 용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얄궂고 슬프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라는 말 대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은 최소한의 위로다. <안경>이 힐링무비인 이유는 자유를 찾아 떠나라는 말이 무책임하게 들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지만, 106분 정도는 스스로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데 투자해 보는 것은 어떨까.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놓아보고 싶었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버리는 이상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편히 쉴 수 있으리라 장담한다.




안경 (Megane)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荻上直子)

음악 카네코 타카히로(金子隆博)

개봉 2007.11.29

장르 코미디/드라마

등급 전체관람가

러닝타임 106분  

수상내역 51회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추신. 단지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고 즐길 뿐 전공자가 아니기에 다소 허술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여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셨다면 언제든 댓글로 피드백 남겨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특별한 사람은 외롭습니다, <크루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