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달 Feb 15. 2022

이제보니 처음부터 이별이었어.

2년의 가정보육 끝. 어린이집 등원 시작.

요즘 온통 내 신경은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에 쏠려있다. 매일 같이 두통이 올 정도인 것을 보니 정신적 압박이 큰 듯하다. 사실, 아이는 어린이집에 잘 적응 중이다. 대 코로나 시대에, 심지어 확진자가 최고조로 급증하는 이때에 어린이집에 보낸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나나 오빠나 친정엄마나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 더는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에게 ‘왜 어린이집을 가야 하는가’를 설명하다가 머리가 멍해지기도 했다. ‘엄마 아빠가 돈을 벌어야 너에게 좋은 옷과 맛있는 밥을 사줄 수 있어.’라니! 그런 구시대적 해석을 아이에게 전하다니! 나도 우아하게 ‘엄마 아빠도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게 있다.’라며 설명하고 싶지만 이걸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그리고 더욱 깊게 들어가면, 내가 진정 이 직업에 종사하는 이유가 자아실현이 아닌 까닭에 차마 그리 아이에게 설명하질 못하겠더라는 변명을 해본다.


매일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말은 한다. 가면 막상 잘 놀면서. 아무튼, 며칠 동안 뽀로로가 그려진 비타민 사탕을 입에 넣어주고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이거 이거 또 은근히 찜찜해지기 시작해졌다. 얘, 설마!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면 엄마 아빠가 뽀로로 사탕을 준다. 나이스!’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오오. 그래도 바쁜 아침 시간에 아이가 울면서 떼를 쓰는 게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나는 오늘도 안경 쓴 펭귄 친구에게 무너진다. 기꺼이 무릎을 내주겠다 이 말이야.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은 불안과 편안, 조급과 행복이 뒤섞인 이상한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고추장 바른 아이스크림, 바지 위에 팬티 입는 이상한 상황인지 모르겠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부지런히 밀린 집안일도 하고, 미뤄왔던 드라마도 보고 좋은 시간을 보내며 ‘어우 애 없는 시간 꿀맛.’하고는 했지만, 언제 울릴지 모르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서 혹시 원장 선생님께 온 연락이 없는지 수십 번도 더 화면을 켜보게 되는 나는야 분리불안 찐하게 앓고 있는 엄마다.


난 나만 분리불안인 줄 알았다.


‘어린이집 벨이 울릴 때마다, 엄마? 하면서 가더라고요.’ 하원을 시켜주시던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하마터면 꼴사납게 어린이집 문 앞에서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초보 엄마는 원장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야 제 맛 아니겠는가. 그리고 저 말은 단단히 마음먹은 내 마음에 작정하고 쏘아 댄 거대한 포탄 같은 것 아닌가. 응? 맞다고 해주라. 아무튼 맞는 거다. 간신히 눈물을 참고 품에 아이를 안아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아이를 나와 떨어뜨려야 맞는지 수십 번도 더 고민했다.


음, 이별은 어렵다. 연인 간의 그것이든, 가족 간의 그것이든. 이미 내 시간에 녹아든 사람과 떨어지기란 그 아쉬움이 도를 넘어 간혹 심장을 도려내는 일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와 나의 첫 만남은 감히 말하건대 역설적이게도 이별이었다. 가녀린 몸을 두 팔로 안아 든 건 처음이었지만, 한 몸으로 연결되었던 시간을 뒤로한 이별. 탯줄을 잘라내고 이별. 네 폐로 첫 숨을 쉬기 시작하며 이별. 품을 벗어나 두 발로 세상을 내딛고는 이별.


너의 성장은 매번 나와의 이별이었고, 앞으로 너와 나의 시간에 무수히 많은 처음과 이별이 있을 것이므로 아아, 나는 계속 단단해져야만 한다.


처음 걷기 시작하는 아이의 두 발에 딱딱한 살이 차오르는 것처럼 어떤 이별에도 내 마음이 그 자리 그대로 굳게 버틸 수 있도록.


역시 이별이라 슬퍼말고, 아이의 처음을 우렁차게 응원하는 편이 좋겠지.


얼마든지 이별해도 좋아, 아이야. 우선 너의 첫 낮잠을 온 맘 다해 응원한다.


그리하여, 우리 딸 첫 낮잠 성공! 기특한 고로.












작가의 이전글 친구 A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