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말고 인정할게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베트남 사파 <판시판> 절경이다. 가기 전부터 블로그와 유튜브로 수십 번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날씨가 정말 좋아야겠구나" 최근 2년 동안 다녀왔던 해외여행에서 항상 궂은 날씨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앙심도 없으면서 제발 가는 날에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여행 1일 차 날씨] 천둥번개를 동반한 뇌우
[여행 2일 차 날씨] 하루종일 비가 내릴 예정임
[여행 3일 차 날씨] 부분적으로 비가 내림
여행 당일과 가까워지고 일기 예보를 확인할 때마다 나는 심란해졌다. 어떻게 내가 가는 3일 동안 그냥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천둥 번개까지 친다는 걸까? 날씨 요괴가 날 따라다니는 게 틀림없다. 그보다 비가 올 거면 쭉 오던지, 내가 사파에서 떠나자마자 해 뜬다는 사실이 너무 얄밉게 느껴졌다.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기에 더 짜증이 났다.
늦은 밤 하노이 공항에 도착해 슬리핑 버스를 타고 사파로 이동했다. 새벽에 도착한 사파의 첫인상은 어두컴컴했고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단 허기진 배를 채우러 쌀국수 맛집으로 향했다. 베트남은 새벽부터 장사하는 식당들이 많아서 신기하고 좋았다. 쌀국수 국물 한 숟가락에 심란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같이 나온 볶음밥도 최고였다. 타고난 예민함도 단번에 단순해지는 순간이었다.
배를 채우고 산책 겸 호수 주변을 걸었다. 우중충한 날씨 덕분에 운치를 느꼈다. 사파를 '베트남의 스위스'라고 홍보하던데 이해가 됐다. 스위스는 가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곧이어 피로가 쌓인 몸을 풀고자 마사지샵에 갔다. 발마사지 30분에 단돈 5천 원이다. 거기에 녹차와 망고까지 나온다.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서비스였다. 노곤해진 몸을 맡긴 채 마사지를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가 뜨기 시작했다. 나와 친구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강렬한 서로의 눈빛을 읽었다.
바로 지금이야! 판시판을 가야 할 때.
판시판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높은 고산지대다. 눈앞에서 구름이 지나가는 모습이 계속 보였다. 구름 속을 걸어 다니는 기분은 오묘하고 짜릿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가는 경치가 장관이었다. 괜히 베트남의 스위스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라며 친구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어째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같은 케이블카를 타고 있던 관광객 모두 '이게 뭐지?' 싶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정상에 도착했을 땐 불길한 기운 그대로였다. 비바람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베트남 사파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줄 알았던 내 예상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사파에서의 모든 일정에 비가 내렸다. 하루종일 비가 내려 무리한 야외 일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궂은 날씨 덕분에 챙겨갔던 책도 읽고 수영도 맘껏 했다. 낯선 공간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제대로 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일기 예보는 계속 확인했다. 혹시 모를 반전을 기대하며.
다음 주에 왔어야 했나...
이럴 거면 하노이 구경을 먼저 할 걸
여행 내내 미련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약 같이 간 친구가 저런 말을 했다면 "이미 왔는데 어떡하라고!" 버럭 소리 질렀을 거다. 남에겐 한없이 쿨한 척하면서 실제론 구질구질하고 찌질한 사람이니까. 비단 여행뿐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지나간 것들에 미련을 갖고 자주 후회한다. 정말 쓸데없는 시간 낭비와 감정 소모다. 그러다 보니 미련도, 후회도 습관이 돼버렸다.
비록 화창한 날씨 속 사파의 매력을 느끼진 못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서 다짐한 게 있다. 부정 말고 인정하기. 나에게 벌어진 모든 상황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