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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그린 Apr 15. 2022

우리가 만든 게임판



어릴 적, 나와 남동생은 진한 갈색 교자상 앞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근엄한 목소리를 내며 금요일 밤에 만나기로 한 우리는 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바로 작은 책과 게임 판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춘기가 오기 전이어서 그랬는지 동생은 나의 다양한 요구에도 순순히 응해주었다. 먼저 작은 책을 만들기 위해 스케치북 한 장을 찢어 가위로 오렸다. 나는 만화 속 캐릭터를 보고 따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직도 생각나는 만화는 “태양의 기사 피코”였다. 민둥하게 깎인 머리에 큰 눈망울을 지닌 아이였다.


 말풍선 안에 글자가 꽉꽉 채워지게 적었다. 완성된 그림은 겹쳐 스탬플러로 찍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심심할 때마다 만화책처럼 즐겨보았다. 책상 위에도, TV 밑에도, 가방 안에도 여러 권을 만들어서 넣어 두었다. 다음으로 공을 들여서 만든 것은 게임 판이었다. 친구 집에서 해본 게임 방식이 또렷이 기억이 나지 않아 아예 새롭게 제작하였다. 커다란 네모 안에 작은 네모들은 규칙이 적힌 칸이 되었다. 작은 말은 놀다가 분실되지 않도록 끝난 뒤에 종이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넣어두었다.      


그런데 이 놀이가 끝난 건 이모네 집에 놀러 가게 된 후부터였다. 남매인 우리들은 비슷한 또래로 방학이 시작되면 일주일간 자고 오곤 했다. 들뜬 마음으로 이모네 집에 도착했을 때, 하필 친척 언니가 새로 산 게임 판을 자랑하는 날이었다. 말로만 듣던 부루마블 게임은 하얀 스케치북과 다르게 튼튼해 보였다. 게임 말은 어찌나 다양한지 몇 번이고 더 하고 싶게 만들었다.


화려한 신고식을 마친 게임 판을 보고도 동생은 우리가 만든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가방을 가져와 쓱 꺼내며 “우린 이런 게 더 재미있는데”라고 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거칠게 동생 손을 가방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동생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다가 “이게 창피한 거야?”라고 물었다. “꺼내지 마”라고 웅얼거리는 내 목소리 때문에 확신을 한 것이다. 그 뒤로 동생은 토라 진 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창피해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아마 2살 위인 내가 동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다른 듯했다. 우리는 매번 만들 때마다 정성을 다했고 다정하게 섞인 대화는 하나의 놀이였다. 그런데 부끄러움이 한순간에 덮쳐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더 이상 게임 판을 만들지 않았다. 의미를 찾지 못했고 동생과 마주 앉아 놀이하는 것이 어색했다. 그때 나는 게임 판 하나 때문에 부끄러워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보고 느껴지는 모든 대상이 비교되었다. 넓은 거실이 딸린 아파트, 먹고 싶은 것은 다 사 먹을 수 있는 여유, 열어보지도 않고 먼지가 쌓인 게임 판들. 눈에 보이는 족족 위축이 되었다. 그날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놀림도 받지 않았다면 무엇을 더 만들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서로 머리를 쥐어짜서 발명품 하나는 만들지 않았을까. 결국 상상의 씨앗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깊게 묻히고 말았다.


지금은 하얀 스케치북을 오리는 대신 하얀 문서 창 앞에 서 있다. 커서만 깜빡이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글을 쓴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울림 있는 문장으로 글 한 편을 완성해내지 못하는 것이 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조급함은 조건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하소연 하고 싶었다. 나는 바쁜 현실 속에서 아이의 뒤치다꺼리하는 엄마라고.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힘이 든다고. 그런데 그것을 이유로 대기에는 조금 억지가 있다. 정말 간절하게 들이댄 적이 있었던가. 흠뻑 빠져들었던 그 시절을 생각해본다. 별 재료 없이도 뚝딱 만들어낸 손때 묻은 것들은 내 불안을 잠재워 주었다. 시선을 남으로 옮기면 가방에 구겨진 게임 판처럼 되고 만다. 빛을 보기도 전에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 흘려보낸 조각들을 틈틈이 주워 담고 싶다.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찢어지더라도 온기가 가득했던 우리의 게임 판처럼 그럴싸함보다 꾸준히 스며드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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