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교사였어요"
"애 잘 키우겠네"
다들 나에게 애를 잘 키우겠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아이를 좋아하고, 행사를 신나게 즐겼던 나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반을 통솔하고 밀린 서류 업무를 하던 직장인과 내 아이를 기르는 일은 비슷하지만 다른 일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자신 있었지만 막막한 건 요리였다. 신혼 때, 빠르게 뚝딱이며 음식을 만드는 건 남편이었다. 아예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는 주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뭐라도 해야 했다. 쌓인 젖병을 세척하고 소꿉놀이하듯 적정량의 채소와 고기를 끓여서 이유식을 만들었다. 그러다 막히면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다 뒤져봤다.
게시물을 찾아보면서 놀라웠던 건 육아를 하면서 요리와 집 콕 놀이 방법을 수시로, 정성스럽게 올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사진 속 깨끗하고 예쁜 집과 우리 집을 힐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식판에 담긴 오색찬란하고 영양만점 음식을 보니 반찬 세 칸도 다 채우지 못한 식판이 초라해 보였다. 나름 아이들과 놀아봤다는 사람이 정작 내 아이에게는 오감 놀이 하나가 버거워 겨우 큰맘 먹고 해줘야 하는 것이 조금 울적했다.
나를 하찮게 여기는 부정적 생각이 꽉 찰 때쯤 멈추기로 했다. 땅굴 속으로 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제일 자신 있는 걸 찾아야 했다. 금 손은 아니지만 쉴 새 없이 떠들 수 있는 입이 있었다. 몸이 민첩했고 호응 하나는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쉬운 방법 하나는 아이가 뱉는 단어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면 된다. “호” 하면 “호” “푹”하면 “푹 ” “간다.” “간다.” 억양은 평소 목소리보다 조금 더 높게 냈다. 아이를 대할 때 의성어, 의태어를 많이 썼다. 온갖 장난기를 섞어서 뿡뿡, 띠리릭, 아삭아삭 소리를 내고, 아이가 걸어갈 때도 효과음을 주었다. 그걸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했고, 여러 번할 때마다 아이의 표현력도 늘었다.
어쩔 수 없는 직업병으로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는 일은 익숙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몇 번씩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까지 300곡 정도는 작사, 작곡한 것 같아.”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배운 노래를 알아들을 수 없게 해도 나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시원한 곳을 긁어준 것처럼 만족해하고 즐거워했다. 나만 누릴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찬스가 존재한다. 노랫말을 듣고 검색해도 되고 영상을 통해 따라 불러도 된다. 어린이집에 다닌다면 교육계획안 속 새 노래 란에서 노래와 손 유희를 미리 알아두면 아이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관찰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말을 할 수 없는 아이에게 “왜 그러는데?“ “왜 아팠어?“라고 남편이 묻곤 했다. 넘어져서 다치고 불편한 상황을 아이는 조리 있게 말할 수 없다. 그전에 이미 어른이 상황을 관찰하고 빨리 개입해야 한다. 시야에서 놓쳤다면 아이의 마음을 어른이 대신 말해줘야 한다.
하지만 일하는 당시에 내가 오은영 박사님처럼 했을까. 양쪽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느라 급급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괴롭고 아픈 날이 많았다. 오랜 시간 공부해온 전문가도, 대단한 선생님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다. 육아하면서 아이들이 같은 나이여도 발달 상황에 따라 개인차가 있다는 걸 매번 깨닫는다. 다른 색을 지닌 아이들을 내가 잘 보듬어주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학부모가 되어 또 다른 마음을 이해한다. 그때 엄마들이 왜 그랬는지 절절히 느껴진다.
동시에 나를 살린 말도 기억한다. 선생님 덕분에, 선생님이 한 번 더 맡아달라는 말은 큰 선물이었다. 어느덧 스승의 날 주간이 흘러가고 있다. 가르침을 주는 모든 분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오늘도 아이와 씨름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양육자분들의 위대함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