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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익상 Feb 09. 2024

독서일기 파일럿

04

[이 탐구는 처음에는 언어행위에 대한 탐구와 닮았다]

존재양식과 관련된 범주 오류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탐구. 가치들의 갈등을 과학 대 종교와 같은 식의 쌍으로 비교하여 불투명성과 일부 관련된 “긴장의 상당 부분이 한 양식의 진실성 veracity 을 판단하기 위해 다른 양식의 진리진술verdiction 조건을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전제는 양식의 다원론, 그리고 각 양식의 진실/거짓을 판단하는 키의 다원성. 핵심은 경험의 진실, 거짓에 대한 단언을 명확히 하는 것. / 하지만 진실과 거짓도 여러 유형이 있고 그 각각은 구체적/실천적/경험적인 조건들에 의존한다.

주장: “유형들에는 양립할 수 없는 적정성 조건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판단 대상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논박의 여지가 없는 판단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당장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법의 예; 법의 가치는 “과학적”이라고 선언하는 판단에 적용될 식별력을 가진 가치들과 닮지 않았지만, 그 고유의 진실과 거짓의 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것이 존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인가에 주의를 쏟는 것이 저자가 하려는 일. 이성(reason)이 “다양한 유형의 경험을 단계적으로 따라가게 해주고 각각의 양식에서 매 경우 판단의 실천적 조건을 파악한 후 참과 거짓을 추적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 정의에 동의한다면 저자의 기획은 합리적(rational)이다. 오컴의 면도날 =/=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은유. 고르기우스의 매듭 은유와 혼동인듯. 오히려 오컴의 면도날은 하나하나 잘 연마된 여러 종류의 도구 세트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도구가 그들이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다른 문화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준다면 특히 더”


[상이한 존재양식들을 식별하는 법을 배우는 동안에] 언어가 가치의 다원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현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 자체로는 앞으로의 탐구를 통해 드러날 “다양한 경험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좌표계를 발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존재양식의 문제는 형이상학, 더 정확히는 존재론 - 근대인을 대상으로 하기에 지역적인 - 과 관련된다. “적정성 조건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역할은 언어가 아닌 존재여야 한다. 언어가 그 역할을 맡는다면 (관대하거나 수용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하기 방식’이 증식하더라도 존재양식은 여전히 하나일 것이다.

“상대주의는 절대 현금을 거래하지 않는다.”(Relativism never traffics in hard cash. 뭔 소리임? 그러니까, 말로만 인정하는 상대주의 비꼰 거겠지? - 더 보니 그런듯.) 이런 종류의 정신적 제한, 평화주의와 우월한 겸양의 기이한 조합. “그런 순환에서는 아무도 개방적인 태도에 대한 존재론적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상이한 말들과 단일한 실재, 표상들의 다원론과 존재의 일원론. 결과적으로 외교는 무용하다. 모든 대표자가 실제로는 다른 더 높은 곳에서 이미 중재가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당사자가 최적의 분매, 논박할 수 없는 중재자, 그리고 어딘가에 <게임마스터>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협상할 것이 없다. 가장 협조적인 이성이라는 선한 모습을 하고 폭력이 재개된다. 우리는 신성 재판 시대 이후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모두 불태워라. <실재>가 가려내리라!”” (중요 체크!)

서로 다른 존재양식들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말과 사물, 언어와 존재 사이의 오랜 노동 분업을 재검토하는 것. “우리의 목표는 언어의 다양성은 더 적게 취하고 - 신용이 아니라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 존재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자들의 다양성은 더 많이 취하는 것이다.” 앞으로 시간을 들여 다룰 난제: 복수의 범주들이 있는 것이며, 지식에 대한 의지가 존재의 다양성을 탐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범주는 아니다. “적정성 또는 비적정성 조건들은 언어행위 이론에서처럼 말하기 방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 사이의 식별 가능한 차이들 가운데 하나에 결정적으로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 다르게 관여하는 존재양식들을 가리킨다.” (으으으 어렵소)

‘존재론적 다원주의’는 세계들을 보다 공평한 기초에서 비교하고 평가하기 시작할 수 있게 한다. “말하기의 자유에서 잃을 것을 - 말은 존재의 무게를 갖는다 - 이론에서는 더 이상 자리가 없고 매 경우마다 그에 적합한 언어가 발견되어야 하는 여러 유형의 개체들과 접촉할 수 있는 힘을 통해 되찾을 것이다.” 민족지 연구 차원에서 끝내지 않고 철학까지 가는 것은, “현장이 모든 단계에서 - 근대인 가운데서도 - 드러내는 놀라운 발명들을 마침내 이론적으로 정당하게 다룰 수 있는 메타언어를 만들어내려는 희망” 때문. ‘제도라는 관념을 회복’(하는 게 이 프로젝트의 목표 중 하나였던가… 이제는 가물거리네)

p.41~47


어어어 오늘 서론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유닛 하나 남기고 항복. 갈수록 곱씹어야 하는 구절이 많아져서 시간이 배는 더 든다. 일단 많이 그대로 옮겨뒀으니 다시 돌아오도록 하자. 이해해야 윤문이나 요약이 가능한데,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호한 데가 정말 많았다. 사이트 가입은 아직도 안 되었지만, 영문판은 어찌저찌 구함. 사이트에서 받고 싶었는데. 그래도 그거 없었으면 오늘 시간 곱절은 더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색인어

존재양식 mode of existence

범주 오류 category mistakes

(J.L.) 오스틴 Autstin

적정성 및 비적정성 조건 felicity and infelicity conditions

형이상학 metaphysics

존재론 ontology

언어 language

범주 category

철학 phylosophy

메타언어 meta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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