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넷
요리책은 아닙니다만
모두를 위한 밥상 이야기입니다
KTX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보니 초록빛 무논 위에 모내기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기계로 심어도 허리를 구부려 채워야 하는 틈새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 손이 참 섬세하다. 어릴 적 고향에서 모내기를 할 때는 못줄을 잡거나 모판에 한 묶음씩 쪄놓은 모를 나르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모내기를 한 날이면 어머니는 찰밥을 준비하셨다. 찰밥은 식어도 맛이 있고, 속도 든든하니 못밥으로는 제격이었던 것 같다.
청와대에서 맞은 첫봄에 대통령님을 모시고 경주로 모내기 봉사를 갔다. 안강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는 옥산마을, 이 마을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만인소가 소장된 옥산서원이 있다. 만여 명에 달하는 유학자들이 일일이 연명을 했던 청원서가 바로 만인소다. 그냥 시위 한 번 한 것이 아니라 자필로 이름을 쓰고 목숨을 걸고 한 실천 운동이었다.
모내기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대통령님은 장화에 밀짚모자를 쓰시고 이앙기 운전대를 직접 잡으신다. 마을 사람들이 참 좋아하신다. 드론이 농사일을 거드는 풍경도 반갑다. 스마트팜을 넘어서 스마트 농업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리 멀지 않은 일이 아닐까 싶다
모내기로 한바탕 땀을 흘린 농군들을 위해서 마을 부녀회가 새참을 마련해주셨다. 논두렁 새참은 개운한 멸치육수에 말아낸 국수다. 거기에 노란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내놓으신다. 노동주로 막걸리보다 더 좋은 술이 있을까. 모처럼 땀 흘린 뒤에 먹는 국수와 막걸리 맛이 참 좋다.
요즘엔 칼국수나 우동면이 아닌 중면이나 소면을 잔치국수라고 부르곤 한다. 옛 시절 잔칫날에 자주 해 먹는 음식이어서라고 한다. 꼭 잔칫날이 아니더라도 사실 국수는 작은 잔치처럼 즐거운 음식이다. 늘 일상으로 먹는 밥을 벗어나 먹는 특식 같은 느낌이랄까.
특별한 재료가 없어도 맛있는 게 국수다. 잘 익은 솔 김치(전라도에서 부추김치를 부르는 말)나 열무김치, 혹은 파김치가 있으면 그 국물에 슥슥 비벼서 먹는다. 어릴 때는 맹물에 슈가를 타서 달달하게 먹는 것도 좋아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국수는 반갑다. 메밀국수나 칼국수는 언제나 환영이다.
막걸리는 어김없이 한 다발의 추억을 소환해낸다. 나의 아버지는 고향 금산면의원을 지내셨다. 선거철이 되면 어머니는 막걸리를 담그느라 바쁘셨다. 동네 사람들에게 한 잔씩 대접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막걸리 선거 비슷한 것이 섬마을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8남매를 키우셨다. 8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집안의 자잘한 심부름을 곧잘 했다. 농약통을 매고 약을 하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거나 소에게 풀 뜯기는 일 같은 것들이다. 그중 하나가 막걸리 심부름이었다.
집에 손님이 오시면 형님이나 어머니가 막걸리를 받아오라 하셨는데, 막걸리를 파는 가게가 꽤 떨어져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다지 멀지 않을 거리인데 어린 내 걸음으로는 큰 산 하나를 넘는 것처럼 멀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큰 샘이 하나 있었는데, 주전자를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자면 어김없이 목이 말랐다. 샘에서 물을 마시면 될 일이었지만 눈앞에 막걸리가 있었다. 단 것 같기도 하고, 신 것 같기도 하고, 홀짝거리다 보면 기분도 괜찮았다.
그렇게 큰 샘 가에 앉아 인생의 첫술을 혼자 배웠다. 꽤 많이 마실 때도 있었는데, 걱정은 없었다. 바로 옆에 샘이 있었으니 말이다. 술도가에서 받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막걸리는 큰 샘을 지나면서 조금 싱거운 술로 변해 배달이 되곤 했다. 어머니와 형님은 알고도 모른 척하신 것인지, 몰라서 모른 척해주신 것인지. 하긴 모르셨을 리가 있나. 어린 녀석 볼이 발그레하고 걸음도 온전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대학 시절의 술도 물론 막걸리였다. 비싼 맥주는 먹을 형편도 못되었으니 만만한 게 막걸리였다. 대동고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형님들은 재수를 권하셨다. 진로를 바꾸어 세무대학교에 들어가길 바라신 것이다. 나 또한 그 길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면서 세무대학교에 갈 준비를 하겠다고 형님들께 말씀드렸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말았다. 놀 줄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고, 그저 공부만 할 줄 알았던 내 모습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나를 서클로 이끌었다. 하필 사회과학 서클이었다. 특유의 성실함은 서클에서도 십분 발휘가 되었다. 선배들이 읽어보라는 철학책이며 경제학 서적들을 꼼꼼히 읽었고, 시국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목도했던 광주항쟁의 처참한 모습들을 가슴에 담아만 두고 있었는데, 가슴과 이성이 제대로 만났다고나 할까.
부당한 정권이 국민에게 총칼을 겨누는 시대, 무고한 이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투옥이 되는 시대에, 공부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인가 깊은 고민이 시작됐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형님들이 바라시던 세무공무원의 길에서는 멀어져만 갔다. 아마도 그 시절을 살았던 많은 청년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에 휩싸였을 것이다. 착실하게 가정을 꾸려가는 안정적인 가장의 모델은 변형이 전남대 운동장에서, 상대 뒤편의 주막에서 막걸리는 청춘들의 울분을 함께 해주는 벗이었다.
막걸리가 소환해주는 또 하나의 기억은 지금은 가정의학과 의사가 된 내 친구 강용주다. 대학 3학년 말쯤부터 4학년 초까지는 용주랑 나는 함께 자취를 했다. 전남대 의대에 다녔던 용주와 나의 하루 마무리는 바로 막걸리였다. 누구라도 집에 빨리 오는 사람이 동네 어귀 가게에서 두부 한모와 막걸리를 사 왔다. 두부와 김치와 막걸리가 있는 신안동의 작은 자취방, 우리는 막걸리를 나눠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허기도 달랬다.
강용주는 그 이후에 간첩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무려 14년 동안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나 역시 8년형을 선고받고 가석방되기 전까지 3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닥쳐올 가혹한 운명은 짐작조차 못 한 채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걱정하고 있었다니. 감옥에 가서도 가끔씩 용주랑 마시던 막걸리가 생각나곤 했다.
정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술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막걸리다. 박정희 대통령은 막걸리 사랑으로 인해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도 막걸리를 참 좋아하셨다. 청와대 만찬주로 소백산 대강막걸리를 쓰기도 하셨고, 봉하마을에서도 상동 탁주를 즐기셨다. 봉하마을의 친환경 쌀로 빚은 막걸리는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즐겨하는 술이 되었다.
의원 시절, 조원진 의원과 함께 마신 영호남 화합 막걸리도 빼놓을 수 없다. 연금 협상을 함께 풀어낸 인연으로 가까워진 조원진 의원에게 대구의 당직자들과 시민들을 모시고 광주로 오실 것을 제안했다. 조 의원을 비롯한 대구분들 400여 명이 망월묘역을 참배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그날의 마무리도 역시 막걸리였다. 팔공산 막걸리와 무등산 막걸리를 한데 섞은 일명 영호남 화합주를 나눠 마셨다. 요식행위처럼 생각되겠지만 영호남 화합은 당시 너무나 절박한 문제였고, 그 자리에서 막걸리를 나눠마신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20대 총선에서 공천에 탈락하고, 눈물의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독일행을 준비하던 무렵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무등산 자락에 있는 무돌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셨던 기억도 난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탈당과 복당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당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좋은 정치는 좋은 정당을 통해 구현된다는 믿음은 나의 오랜 정치적 신념이다. 당을 지키고 당의 발전을 통해 좋은 정책과 좋은 정치인이 나온다는 나의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함께 망월묘역을 참배하고 나오면서 무돌주막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면서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광주를 잘 부탁한다 말씀하셨다. 빨리 돌아오라는 말씀도 함께 하셨다. 그 말씀을 새긴 채 독일에 갔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빨리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진행되었고, 조기 귀국 요청을 받았다. 귀국하자마자 문재인 대선캠프의 상황실장을 맡아 공약을 만들고, 민심을 챙겨야 했다. 그때 문재인 대선후보와 광주시민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위해 마련한 자리 또한 '월곡시장의 막걸리 토크'였다.
청와대에 온 이후로는 일요일 밤 당청정 9인 회의에 가면 늘 막걸리를 마셨다. 이낙연 총리의 막걸리 사랑 덕분이었다. 이 자리에 가면 전국 각지의 막걸리가 돌아가면서 나오곤 했다. 부산 금정산의 누룩 막걸리, 포천의 이동 쌀막걸리, 내 고향 고흥의 유자 막걸리, 해남에서 찹쌀로 빚은 해창주조장 막걸리까지 맛 좋고 이름도 멋진 막걸리들을 고루 맛보았다. 막걸리가 그 고장에서 나는 쌀과 누룩, 물로 빚는 것이라 물맛에 따라 쌀이나 재료에 따라 빛깔과 향, 맛이 정말 달랐다.
그 당연한 사실이 참으로 반가웠다. 독일에 있을 때 뮌헨의 헬러스와 둔켈, 베를린의 바이세, 뒤셀도르프의 알트비어, 퀄른의 퀄시비어 등 독일 전역에서 각기 다른 풍미를 자랑하는 맥주가 생산된다는 사실이 못내 부러웠다. 독일인의 맥주사랑도 놀라웠지만 지역의 정체성을 간직한 맥주가 지역분권의 상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의 개성 있는 막걸리를 총리공관에서 접하면서 지역의 막걸리 문화가 되살아나듯 지역분권도 궤도에 올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곤 했다.
코로나 시국에 들어서서 막걸리 매출이 12% 이상 늘었다고 한다. 특히 재료를 고급화한 프리미엄 막걸리의 매출이 더 늘었다고 한다. 집에서 마시기에 좋고, 혼자 마시기에도 좋은 술이어서 그렇다는 분석이다. 사실 수년 전부터 막걸리는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고 있는 것 같다. 한때는 전국의 주조장들이 문을 닫는 쇠락기였는데 막걸리는 어떻게 부활을 한 것일까. 전문가들 분석은 막걸리가 새로워졌기 때문이란다. 새로운 맛과 디자인으로 종류도 다양해지고,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젊은 세대가 즐겨 찾는 막걸리 주점들도 늘어났다. 전통술이면서 젊은 술이 된 것이다.
예전에는 막걸리가 정치를 도왔는데, 이제 정치가 막걸리를 배워야 할 듯싶다. 또렷한 지역색으로 사랑받고, 프리미엄으로 변신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막걸리를 말이다.
<강기정의 청와대 밥상 이야기>는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