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다섯
요리책은 아니지만
모두를 위한 밥상이야기입니다
그냥 음식이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의 추억이자 고향 그 자체인 음식들이 있다. 목포의 홍어, 강원도의 감자옹심이, 제주도의 몸국이 그렇다. 부산사람들에게 이런 소울푸드가 있까. 바로 돼지국밥이다. 영화 변호인에서도 돼지국밥집 아들이 나온다. 돼지국밥에는 부산의 역사와 부산사람들의 문화, 애환이 다 담겨있다. 지역마다 돼지국밥이 있지만 다르다. 그냥 돼지국밥이 아니라 ‘부산돼지국밥’이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도 부산돼지국밥을 참 좋아하신다. 부산 사상구에서 국회의원 생활을 하시는 동안에는 개인 SNS에 '고슬한 밥과 돼지고기가 송송 담긴 뽀얗고 뜨끈한 돼지국물에 다대기와 부추, 소면, 새우젓을 곁들여 숟가락으로 솔솔 섞어 한 입~. 돼지국밥 한 그릇 드시고 가세요’라는 글을 올려 돼지국밥에 대한 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하셨다. 돼지국밥 한 그릇으로 오늘의 피로를 풀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부산사람들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이리라.
문재인 대통령님과 함께 부산돼지국밥의 진수를 맛볼 기회가 있었다. 바로 부산에서 지방 최초 국무회의가 열릴 때였다. 국무회의는 광화문 정부청사나 청와대에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예외가 몇 번 있었다. 3·1절을 앞두고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했고, 일본 수출규제 이슈가 한창이던 때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회의를 열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선언을 한 바 있다.
세 번째 청와대 밖 국무회의를 부산에서 하자고 제안한 것은 나였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취임 초기부터 한-아세안 열 개 국가를 모두 순방하시며 신남방정책에 공을 들여오셨다. 그 성과로 한-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이 모두 참석하는 특별정상회의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미·중·일·러 4강 중심의 외교에서 탈피해 아세안과의 외교를 도약시킨 것은 우리 정부가 거둔 소중한 외교 성과다. 성장 속도가 빠른 아세안과의 협력은 우리의 경제발전과 외교적 입지를 높일 중요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와 제1회 한·메콩 정상회의에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부산에서 열릴 두 회의를 알릴까 고심하던 끝에 정상회의가 열릴 현장인 부산 벡스코에서 국무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정상회의 준비 상황도 점검하고, 또 회의 개최에 대한 관심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세 번째 현장 국무회의를 부산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부산은 들어서는 순간 특유의 역동성이 진하게 느껴지는 도시다.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개방적이었고 바다를 통한 다양한 문물 교류와 교역이 이루어져 온 곳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성정도 시원시원한 면이 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제일 살기 편한 도시로 부산을 꼽는 이유일 것이다.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가 한창인 부산 벡스코를 둘러보는데 정말 큰 잔치를 준비하는 분위기다. 대통령님도 일일이 준비현장을 둘러보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오전 열시에 열리는 국무회의를 위해 국무위원들이 모여 환담을 하고 있는데, 외교부가 준비한 특별한 커피가 나온다. 아세안 회원 10개국에서 생산되는 커피를 블랜딩해서 만든 스페셜 커피라는데 향이 아주 좋다.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가치를 커피 속에 담았다 하니 의미도 근사하다. 커피는 주로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생산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시아 지역에서도 다양한 커피가 생산된다고 한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인도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세계적 명성을 지닌 우수한 커피란다. 아세안 커피를 마시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외교적 소통의 정점은 ‘문화’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문화적 소통의 최고봉은 ‘음식’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 덕에 아내표 핸드드립 커피를 즐기곤 했는데, 아세안 커피라는 새로운 세계를 부산에서 만날 수 있었다.
국무회의 중에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을 설명하신다. 한 아세안 회의를 통해 협력을 강화하고, 자유무역 질서를 지켜내며, 동아시아 공동체의 초석을 놓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당부말씀이시다. 또한 정상회의에 아세안 국가에서 온 이주 노동자, 유학생, 다문화가족들이 모두 함께하길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다문화 관련 NGO나 각 대학 내 유학생 네트워크 등 민간 분야의 네트워크도 총동원해 모든 아세안들이 함께하는 축제의 장이 되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하신다. 대통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한 가지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연결’이다. 연결의 시대로 진입해야 한다. 연결되지 못하면 도태된다. 그 연결은 지금까지의 연결만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에 의한 연결이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신남방정책의 중요한 한 측면은 아세안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안보 차원에서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아세안과의 북핵 대응 공조와 협력을 이끈다는 데 있다. ’동북아플러스 책임공동체 형성‘은 국정과제다. 이를 기반으로 ‘평화의 축’이 될 동북아 평화협력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러시아, 몽골 등 유라시아 협력 강화를 위한 대륙전략인 ‘신북방정책’과 함께, ‘평화 번영의 한반도’와 ‘신경제지도’ 완성을 위한 핵심이 바로 신남방정책인 것이다.
왜 신남방인가. 그들은 새로운 세계 경제의 성장엔진이다. 평균연령 30세, 20억 인구(GDP 5.4조달러)의 젊고 역동적인 성장지역, 소비시장 연평균(CAGR) 15% 성장하는 지역, 주 소비층인 중산층 인구의 지속적인 증가를 보이고 있는 지역이 바로 동남아다.
OECD는 2030년 세계 중산층 소비의 59%가 동남아 소비층이 될 것을 이미 전망한 바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실제로 인도 13.7억 명, 아세안 6.4억 명 등 신남방지역의 인구는 20억 명에 달한다. 그들의 평균 연령은 30세다. 젊고 발전가능성이 높다. 총생산(GDP) 규모가 아세안 2조9,228억 달러, 인도 2조7,168억 달러에 달하는 새로운 성장거점이다. 5세대 이동통신, 정보기술 등에 가장 유망한 시장이자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대통령은 아세안과의 관계를 주변 4강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고, 아세안 10개국 전체를 방문하셨다. 일본 수출규제를 겪으면서 우리는 더 이상 특정국에 의존하는 교역은 안된다는 걸 배웠다. 아세안 국가들과의 연결을 통해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량국가로서 역할도 할 수 있다.
국무회의를 마치고, 벡스코 앞 돼지국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국밥집 이름조차 대통령 국밥이다. 뽀얀 고깃국물에 새우젓 간을 하고, 부추무침과 고추양념을 올려 먹는데 참 맛있다. 시원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부산사람들을 닮았다.
원래 부산돼지국밥의 시작은 예로부터 이 지역에서 먹던 맑은 돼지고깃국이었다고 한다. 주로 살코기로 국물을 내서 먹었다는데,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부산에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부산의 맛있는 고깃국에 돼지머리도 넣고 돼지뼈나 내장같은 부산물 등을 넣어서 양을 늘여 끓이기 시작했다. 특히 장터에서 그런 확장된 돼지고기국이 잘 팔렸는데, 바쁜 장꾼들을 위해 밥을 말아서 냈다. 그 위에 부추 무침, 부산말로 정구지 무침이나 다진 고추가 올라가 얼큰한 맛을 더했다. 반찬을 따로 집어먹지 않고 김치나 깍두기를 국밥에 섞어서 먹어도 개운하고 맛있다. 한 끼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밥도 되고, 거기에 소주나 막걸리를 곁들이면 훌륭한 안주가 된다. 양도 푸짐하고,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부산식 돼지국밥이 탄생한 것이다. 부산 시내에는 어디를 가나 돼지국밥집들이 많다. 국제시장이나 서면시장, 수정시장같은 재래시장에는 말할 것도 없고, 주택가에도 곳곳에 돼지국밥집들이 있다. 활달하면서도 시원시원한 부산의 기질을 돼지국밥이 잘 보여주는 것만 같다.
사실 국밥을 먹는 내내 내심 부산이 참 부러웠다. 우선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리는 4박 5일 동안 대통령이 내내 부산에 머무시며 부산을 살피신다. 더 나아가 아직도 먼 2030년에 열릴 세계박람회 유치를 의결하는 모습도 선 굵게 느껴진다.
함께 점심을 한 국무위원들 모두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부산 돼지국밥 맛에 만족해한다. 참으로 가성비가 좋고 만족도가 높은 음식이다. 부산의 돼지국밥은 대대로 부산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고, 또한 새로이 부산을 찾아온 이들의 마음까지 연결시키는 소통의 음식같다. 한 그릇의 부산돼지국밥 속에 녹아있는 부산의 근현대사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아침에 마셨던 새롭게 브랜딩된 아세안 커피를 연결지어 생각해본다. 전혀 성격이 다른 음식같지만 조화롭다. 돼지국밥은 우리가 걸어온 역사의 경험치들은 진하게 녹여내주는 음식이고, 아세안 커피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게 하는 음식이다. 평화로운 상생과 교류가 이뤄지는 새로운 연결의 시대를 부산돼지국밥과 아세안 커피를 통해 그려본다.
<강기정의 청와대밥상이야기>는 매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